빌레몬서 | Philemon

2003/01/03 (20:05) from 211.111.22.73' of 211.111.22.73' Article Number : 4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1501 , Lines : 55
(1/03) 몬1:15-25 | 빌레몬, 오 형제여!
2003/01/03



 본문 관찰

 영접하기(15-22)
   사랑으로 영접하라(15-17)
   부채에 대한 보증(18-19)
   처소를 부탁함(20-22)
 교제하기(23-25)
   문 안(23-24)
   축 도(25)  


 
영접하기

이제 오네시모는 빌레몬서와 함께 골로새교회로 돌아간다.
빌레몬을 떠나 도망 올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제는 유익한 자 되어(11), 사랑받는 형제가 되어(16) 골로새교회와 빌레몬에게로 향한다.  바울은 자신을 영접하듯 오네시모를 영접해 달라고 부탁한다(17).  혹 오네시모 때문에 손해가 난 것이 있다면 그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면서 말이다(18-19).  동역자들 사이의 안부를 묻는 인사가 마지막을 장식한다(23-25).



영접하기(15-22)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앵글에서 보고 싶어하는 바울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된다(15).  잘못한 일이나 빚진 것은 '잠시 떠나게' 했지만 하나님은 이 기간마저도 당신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축복의 시간으로 사용하셨으며, 그리하여 '영원히' 오네시모를 얻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하셨다.  참으로 바울다운 통찰이다.  이렇듯 약하고, 부족하고, 못나고, 죄스러운 '잠시'라는 시간을 새사람이라는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바울처럼 사는 것, 이것이 목회자의 소명이 아닐까.

바울은 노예제도 아래 오네시모를 묶어 두려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제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다.  때문에 노예로서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 이상의 사랑하는 주님을 믿는 형제로서 소중한 성도임을 잊지 말기를 부탁한다(16-17).  세상의 신분이 하늘의 신분을 능가할 수 없으며, 하늘의 신분은 세상의 신분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바울은 지금 바로 이것을 빌레몬에게 부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끈이 아직 오네시모의 영적 자유함을 방해하고 있다면 그 값을 바울 자신이 친히 지불하겠다고 말한다(18-19).  어쩌면 빌레몬은 오네시모 때문에 재정적인 큰 손해를 본 모양이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있는 모두를 위하여, 특별히 복음을 위해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과거의 짐을 훌훌 떨어버리고 복음의 미래로 나아가기를 애정을 다해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20-21).



교제하기(23-25)

"나의 동역자 마가"(24a)가 눈이 띈다.  마가는 바울의 제1차전도여행 행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행13:13b).  바로 이 일 때문에 바나바와도 결별하게 되는 일이 있었던 바(행15:36-41), 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나 다시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있다.  그 역시 오네시모처럼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 유익하"(11)게 되었다.  

작별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가운데 바울과 함께 로마의 감옥에 갇힌 자도 있고(23),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랑받는 의원 누가가 있고(24, 딤후4:11a),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던 자리를 버리고 곧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갈 데마와 같은 사람도 있다(24, 딤후4:10a).



부스러기 묵상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골로새교회를 방문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22).
아마도 골로새교회도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빌레몬에게 자신이 머물 방을 하나쯤 마련해 줄 것도 첨언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죄수 아닌 죄수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내일에 대한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바울에게 조그만 것에 안주하고 싶은 인간적인 틈이 너무나 많은 나의 몰골이 여지없이 대비되어진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음에도 나의 기도 역시 응답되지 못함을 자위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 또한 언제나 기도에의 꿈을 꾸곤 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짐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이랄까, 뭐 그런 것보다는 기도의 응답이 늘 연기되거나 거부되거나 다른 것으로 응답되어지는 것 때문에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예측불허(豫測不許)의 영적 시계 때문에 몹시도 힘들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멈출 수는 없다.  여전히 나는 기도하고 기다리며 어떻게 응답될 것인가를 지켜보는 자리에 있을 뿐이다.  기도의 모든 키는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응답이냐 아니냐의 단면만이 아닌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틈새를 읽어내고 싶은, 그래서 거기에 바르게 응답하며 살고 싶은, 기도했다는 것보다는 기도 이후의 나의 모습이 더 빛나고 아름답게 성숙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많음을 고백 드린다.

한 영혼을 향한 가슴 찡한 집중력을 바울에게서 배워보고 싶다.  빌레몬 때문에 오네시모를, 또한 오네시모 때문에 빌레몬을 마음대로 편집하지 않는, 각자의 삶과 인생 그 자체를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볼 수 있는 바울의 균형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좁쌀 같은 나는 아마도 빌레몬과 오네시모 가운데 한 사람을 자꾸만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만큼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아직도 멀어만 보이는 바울과의 간격이다.

나 때문에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11)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꾼으로 자란 오네시모 같은 사람이 있는가.  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당당하다 싶을 정도로 얘기하고 또 부탁할 수 있는 빌레몬 같은 사람이 있는가.  '나의 동역자'라 부를 만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는가.  언젠가 어느 집회에서 강사 목사님이 하신 말,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내 가족을 맡길 그런 친구가 있다.  이 정도면 성공한 것 아닌가?"라던 말이 생각난다.  빌레몬의 잔잔한 여운이 자꾸만 내 마음을 노크하는 걸 느끼며 한 해의 시작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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