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 Philemon

2003/01/02 (23:52) from 211.111.22.73' of 211.111.22.73' Article Number : 3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1377 , Lines : 47
(1/02) 몬1:8-14 | 빌레몬, 당신을 믿습니다!
2003/01/02



 본문 관찰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용서하기

A(바울)와 B(빌레몬)와 C(오네시모) 사이의 용서가 공론화된다(13-14).
당사자들 사이(BC)가 아닌 제삼자(A)가 조심스럽고도 지혜롭게 중재하는 형식이다(8-10).  이는 용서하기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자 해법이 아닌가 싶다.  한 사람에 대한 목회적 섬김의 끝은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바울은 '낳은'(10)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오네시모가 한 건강한 성도로서 당당하게 자라가기를, 이를 위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유무형의 장벽들을 복음의 빛 안에서 제거해 주는 일에 발벗고 나선다.  



오네시모(Onesimus)와 바울

오네시모를 위해 빌레몬에 부탁하는 바울의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A는 B에게 C를 위해 명령하기가 아닌 부탁하기라는 방식을 취한다(8-9,14).  바울의 겸손과 영적 진면목을 보는 부분이다.  한편 오네시모와 바울의 만남은 아마도 로마의 감옥에서 비롯되었지 않았나 싶다(1,10).  비록 죄수끼리의 만남이었지만 복음은 이 두 사람의 사이를 영적 부자(父子) 관계로 발전시키고야 만다(10).  

감옥마저도 영적 출생의 장소였다면 결과적으로 오네시모의 감옥행은 축복의 시작이 된 셈이다.  상식과 세상이라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감옥은 죽음과 저주와 절망의 장소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한 고귀한 하늘의 생명이 태어난다.  그리고 영적 아비와 자녀의 전혀 새로운 관계로 발전한다.  오네시모는 죄를 가지고 감옥에 들어왔으나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복음으로 그를 기다리셨다.

절망적인 장소와 상황이란 없다.  있다면 단지 절망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 비밀을 맡은 사람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고야 만다.  새생명은 감옥에서도 태어나고 자란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곳에 천국은 이처럼 임하는 것이다.  "전에는 … 무익하였"던 자가 "이제는 … 유익하"게 되는 비밀(11), 바로 거기에는 복음과 바울이 있었다.  

바울 안에 있는 복음이 그랬듯이 "내 안에 있는 복음도 이처럼 생명인가?" 싶은 생각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을 파고든다.  복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전혀 새롭게 바꿔놓는다.  이것이 일대일 양육이 보여주는 복음의 능력이다.  바울에게서 한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자의 심장이, 태어난 영혼을 자라도록 하는 양육자의 가슴이, 한 사람을 향한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목회자의 목마름이, 그리고 이를 위한 섬김의 아름다움을 본다.

또한 한 사람을 양육한 목적이 결국 자기 사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11).  이렇듯 제자훈련은 자기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를 양육하고 세우는 것이다.  비록 자기의 '심장'(심복, 12)과 같은 자일지라도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바울에게서 사역자로서의 자기관리의 탁월성을 배우게 된다.



부스러기 묵상

바울처럼 사람에 대한 희망을 붙들면서 살고 싶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들어왔지만 그에게도 천국의 씨앗을 뿌리고, 마침내 그 싹이 자라면 그의 全생애를 복음의 빛으로 품을 수 있는 그런 목회가 내 가슴에서도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해야 할 일(10-12)과 빌레몬이 해야 할 일(13-14)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이를 명령이 아닌 부탁으로 풀어갈 수 있는 겸손한 사람으로(8-9) 문제를 풀어가는 바울에게서 목회자의 따뜻한 심장을 느낀다.

한편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사람과의 문제에까지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는 오네시모와 빌레몬 모두에게 동일하게 중요한 부분이다.  어쩌면 저들을 통해서 오늘 나에게도 이 두 관계의 균형을 요구하시는 것 아닐까 싶다.  이제 오네시모는 빌레몬과의 묵은 과거를 풀어야 한다.  하늘과의 관계가 불편하지 않으려면 땅에서의 관계 역시 모든 얽매이기 쉬운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오네시모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문제없으면 된다는 아니다.  이게 자칫 내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자 한국적 신앙의 쓴뿌리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을 보면서, 동시에 사람을 보는 눈을 놓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이 두 사람 모두에게 부탁하고 있는 목회적 권면의 핵심이다.  

내가 바울이라면, 내가 빌레몬이라면, 내가 오네시모라면 어느 부분에서 잘 하고 있고, 또 어느 부분에서 실패하고 있거나 머뭇거리고 있을까.  각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야 하는 책임과 특권을 동시에 부여받았다.  

나는 바울처럼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보고 있는가.  나는 빌레몬처럼 바울의 영적 지도를 받아 오네시모를 보고 있는가.  나는 오네시모처럼 바울의 영적 지도를 받아 빌레몬을 보고 있는가.  내게 어떤 배역을 맡기시든지 나는 늘 하나님의 믿음이고 싶다.  빌레몬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이 비밀을 묵상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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