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 1 Thessalonians

2003/09/23 (22:40) from 61.98.155.117' of 61.98.155.117' Article Number : 3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1291 , Lines : 75
(9/21-22) 살전2:1-12 |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기
2003/09/21-22



 본문 관찰

 너희 아는 바와 같이 …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우리가 … 아니요 … 아니라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권면은 …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사람에게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우리가 … 하였으니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나님으로 복음으로 … 주기를 즐겨함은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아무에게도 누릴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의 사역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았습니다.”(1, 새번역)

지난 날 데살로니가에서의 사역을 돌아보는 바울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4a)던 ‘그리스도의 사도’(6a)로서 말이다(행9:15-16).  ‘많은 환난’(1:6a)으로 더불어 ‘많은 싸움’(반대, 2b) 앞에서 사도라는 책무를 감당하기란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데살로니가로 가기 전에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던 터라(2a) 어쩌면 다시 고난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대목은 지나친 주관적 상상일 수 있다).  그러나 사도는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나 주님이 친히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귀하다 하지 않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1).  그리하여 데살로니가교회와 그의 사역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복음전하기(1-6)

그는 데살로니가에서의 ‘복음전하기’에서 행하지 않았던 것들을 추억한다.  바울이 이처럼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은 당시에 이런 어이없는 언행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무리들이 많았고, 따라서 복음이 이처럼 값싸게 비취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량(自費量)까지 하면서 이처럼 “아니요 … 아니라”(3- )를 통해서 복음의 의미(가치)를 살렸던 것이다 : “아무에게도 누(累)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9)

그럼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가 당시의 시류(時流)와 달렸던 것들은 무엇인가.  먼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나 속임수로 사역하지 않았다(3).  그랬기에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2b)서도 겉과 속을 모두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종들은 이처럼 바른 생각과 순수한 동기가 중심이 된 정직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끊임없이 고난스러울지라도 말이다.  고난은 복음스럽게 사는 가장 확실한 길이니까.  이것이 아니면 세상과 다를 바 없다.  

둘째로,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4a), 또한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6) 사역하였다.  오히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복음 전도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사역을 했다.  분명 복음을 받는 대상은 사람이지만 이 복음이 하늘로부터 오기 때문에 복음의 주인(주체)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의 입맛에 맞는 값싼 복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사역자의 기본이다.

셋째로, 사역을 함에 있어서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5)하였다.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짜들이 더 화려하고, 진짜처럼 속임수(탈)를 쓰고 행세한다.  진실은 통하는 법이다.  계속되는 사역의 원칙과 자세에 대한 지침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복음행하기(7-12)

   “너희도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0b)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동시에 그 복음대로 사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데살로니가교회를 증인 삼아 고백한다(5,10).  그러면서 그는 이를 위해 유순한 자 되어 ‘유모’(7)처럼, 주의 복음과 자기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하면서(8), 또한 저희에게 누릴 끼치지 않게 위해 자비량으로 살아가면서(9), 아비가 자녀에게 하듯이(11) 복음을 전하며 복음으로 살았음을 말한다.   

(계속)



부스러기 묵상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12)

‘그리스도의 사도’(6a) 바울은 생명을 걸고 사역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복음이 조금이라도 오해(비방)를 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생활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을 통해서 흘러가는 복음이 자신의 죄(무능력, 나태함, 속임수, 불순한 동기, 아첨의 말, 탐심의 탈, 사람의 영광 등) 때문에 왜곡되거나 무력해지고, 그래서 주님과 교회가 욕을 먹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바울은 주님을 위해 모든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었다.  바울에게는 이러한 복음의 프로‘다움’이 넘쳤다.  그는 초지일관(初志一貫) 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복음과 교회(성도) 때문에 “고난과 능욕을 … 많은 싸움 중에”(2)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제와 조금만 다른 오늘이라도 되면 그걸 부풀려서 무엇이든 만들어 보려고 호들갑을 떠는 주책없는 아마추어 인생(‘나’)들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건강한 한 성도의 모델을 바울에게서 본다.

다시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 앞에 선다.  부끄럽게도 바울처럼 취급당하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변명과 항변으로 반응하는 올챙이 같은 나의 연약함이 왜 이리도 더 크게 보이는지 ….  이렇듯 기복이 심한 것은 아직 나 자신 하나만이라도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시키는 것에 조차 실패하며 살고 있다는 뜻 밖에 되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처럼 살아보고 싶지만 그럴 능력도 믿음도 없는 나를 조용히 바라본다.  어찌할까.

바울에게는 자신과 교회에게 요구하는 영성(靈性)이 일치했다.  자신은 아니면서 교회 앞에만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고 불을 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둘의 간격만큼이 내가 회복하야 할, 이루어야 할, 넘어서야 할, 성숙하고 성장해야 할 몫이다.  이를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으랴.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강단(묵상)만을 위해 만들어진 말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가를 잊지 않아야겠다.  바울 앞에만 서면 초라해 지는 나를 본다.  그것만큼 나를 볼 수 있어 그래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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