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 Romans

2000/10/28 (08:48) from 210.219.130.169' of 210.219.130.169' Article Number : 49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3919 , Lines : 63
롬15:1-7 | 구원신앙과 그리스도



  본문 관찰

 1 우리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보살펴 주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해서는 안된다.
 2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
     -서로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
     -"주께 던진 모욕이 나에게 돌아왔습니다."(시69:9)
 4   -전에 기록된 모든 것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성경은 인내를 주어 계속하여 희망을 가지게 한다.
       -성경의 위로로 계속하여 희망을 가지게 한다.
 5 인내와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예수를 본받아 서로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6   -너희가 한마음과 한목소리로 하나님께 계속해서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
 7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리를 받아 주셨다.
   너희도 서로 따뜻이 계속해서 용납하고 받으라.



1-2절

하나님은 누구보다 약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
탕자를 향한 애정을 외면하지 않으시던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느낀다.  하나님은 이들을 믿음이 강한 사람들에게 부탁하신다.  하나님은 지금 이 일을 위해 나를 필요로 하신다.  나를 쓰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은 양쪽을 번갈아 보시면서 말씀하신다.  어느 쪽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시지 않으신다.  약한 자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시고서 우리 강한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오늘도 다음 네 가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보살펴 주어야 한다(1).  하나님은 약한 사람들을 나에게 맡기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마침내 나를 믿음이 강한 자로 대접하시겠단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시고, 사명을 맡기시겠단다.  그것은 약한 자들을 '계속해서' 보살피라신다.  비판(14:1), 업신여김(14:3,10), 판단(14:4,10,13)은 보살피는 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심성을 가질 때 한 두 번(일회용)이 아닌 '계속해서' 보살펴 주는 자로 하나님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다.

②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해서는 안된다(1).  보살핌의 근거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있다는 뜻이다.  약한 자가 믿음이 강한 자로 세워져가는 것이 나의 만족과 나의 보람이라는 기쁨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매우 이기적인 행위다.  따라서 나를 위한 봉사,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섬김은 非진리다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14:7)

③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2).  하나님이 나를 강한 자로 대우하시는 것은 타자(他者)를 위해서다.  하나님의 목표는 나로 시작하여 저 연약한 자리에 있는 이웃에게까지다.  하나님이 나를 믿음이 강한 자로 서는 은혜를 주신 것은 "그래, 너는 강한 자야!"라는 말만 듣는 인간 골동품으로 전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포에 두신 것은 반포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가 반포에 뿌리내린 교회 이미지다.  참 좋다.  남서울교회라고 하면 얼마나 호의적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우리네 이웃인 반포를 기쁨의 도시로 만들고 싶어하신다.  우리 교회는 반포에 세우신 하나님의 얼굴이요 이미지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④ 서로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2).  결국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유익'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강한 자를 건전지처럼 쓰시지 않으신다.  내 것을 다 빼앗으셔서 약한 자를 보살펴 주고, 기쁘게 해주고, 유익하게 하시고는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다.  '서로'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도록 쓰시고 축복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이다.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아이는 결코 굶지 않았다(요6:1-13).  다같이 먹고,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나 남도록 모두가 풍성하게 부어주신다.  또한 가루와 기름이 조금 남이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마지막 남은 것을 드렸지만 사르밧 과부는 결코 굶어 죽지 않았다(왕상17:8-16).  나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3-6절

약한 자를 위한 하나님의 기대를 가장 만족시키신 분이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3, 빌2:5-11).  오직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헌신하셨다.  하나님의 기쁨을 자신의 보람으로 받아 들이셨다.  그러므로 우리 강한 자들의 헌신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에 다시 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한끼 식사를 모든 약한 자들을 위해 주님께 드렸던 무명의 어린아이처럼, 선지자를 위해 마지막 한 움큼의 가루를 아낌없이 내놓았던 사르밧의 과부처럼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 승자(勝者)의 구원신앙이라 깨우치신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십자가까지 참고 인내하셨으며(4),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바라보시며(4,5) 변함 없는, 그리고 중단 없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셨다.  그렇다면 우리일까.  우리 강한 자(1-2)의 헌신의 원형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내가 주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소명(mission)이다.  내가 감히 이 거룩한 사명을 위해 쓰이기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7a).

이제 바울의 소망이 간절한 축도로 봉헌된다(5-6).  그는 로마교회가 예수님을 본받기를 기도한다.  이를 위해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한마음과, 한목소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의 존재 목적을 성취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이 소망하는 공동체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다.  또한 이 일을 같은 마음을 품고 넉넉하게 이루어드리며,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로 하나님의 축복 앞에 서는 공동체다.  6-7절은 이 공동체를 위해 준비된 축복이다.



부스러기 묵상

  "너희도 서로 따뜻이 계속해서 용납하고 받으라."(7b)

주님께서는 자기를 기쁘시게 하지 않으시고 못나고 추한 나를 받아 주셨다.  약하고 약한, 약한 자 중에 가장 약한 나를 십자가의 은혜로 강한 자 되게 하셨다.  바울은 주님을 증인 삼아 이와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권면한다.  아마도 로마교회는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사로 불편한 믿음생활을 함께 해 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업신여김과 판단으로 나타난 듯하다(14장).  바울은 공동체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거기에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  여기에 그의 상식이나 인간적인 지식이 함께 섞이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 본다.  

한 공동체의 건강도와 영성의 회복은 이래야 되지 않을까?  사람의 생각과 전통이 주장되는 공동체는 미안하지만 그리 소망이 없다는 게 이제는 이미 상식이 되었다.  강한 자의 강함이 무한한 힘이 되어 주장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공동체는 미래가 없다.  바울은 이미 14장에서 강자의 논리가 공동체를 지배하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이라고는 비판(1), 업신여김과 판단(3,4,10,13), 그리고 급기야 근심하게 함으로써 망하게 될지도 모른다(15)고 경고한다.

구원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칭의(稱義)의 은총을 받은 성도는 약한 자의 멘토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사셨던 방식대로 약한 자를 위한 멘토링이 시작되었으면 한다.  좀처럼 휘어지지 못하고 부러지는 기질을 가진 나로서는 아마도 이 부분이 넘어야 할 내 사역의 십자가가 아닌가 싶다.  진리 문제가 아닌 한 유연하게(flexible) 살았던 바울의 영성을 본받아야겠다.  이를 단순히 지나가는 묵상으로 흘려버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나도 나를 바꾸지 못하는데 내가 너를 바꾸겠다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기 보다는 무지한 것 아닌가 싶다.  바른 표현인지 조심스럽지만 가룟 유다는 아무도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고, 자신도 끝까지 변화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재주로, 내 힘으로 사람들을 바꿀 수 있으랴!  그러므로 인내(忍耐)함의 성숙으로 나아가야겠다.  존경하는 원로목사님의 충고를 다시금 뇌리에 깊이 각인한다 : "젊은 목사들의 가장 큰 적은 성급함이라는 병이다.  목회는 인내하는 것만큼 된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참으라!"  내가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을 붙들어 오늘 묵상노트에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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