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 Romans

2000/10/26 (08:17) from 210.219.131.233' of 210.219.131.233' Article Number : 47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4018 , Lines : 86
롬14:1-12 | 구원신앙과 자유




본문 분석

 믿음이 약한 사람을 계속하여 따뜻이 맞아 주라.
 그의 의견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A)어떤 사람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믿음을 가졌다.
   -(B)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A는 B를 업신여기지 말라.
     -B는 A를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 모두를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남의 종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서든 넘어지든 그의 주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실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서게 될 것이다.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어느 한 날을 다른 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날을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일은 각각 자기 마음에 정한대로 할 일이다.
       -어느 한 날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 그렇게 한다.
       -A도 그 음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B도 주님을 위해 그렇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없다.
 우리 가운데 자기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산다.
   -우리는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주님이 되셨다.
   -그런데 어째서 여러분의 형제를 비판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여러분의 형제를 업신여기는가?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성경에도 주께서 말씀하신다(사45:23, 49:18)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사람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 자백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낱낱이 하나님께 자백해야 할 것이다.



다양성 속의 일치

교회에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본문에는 두 가지 실재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 ①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  식물만 먹어야 한다(1-4).  ② 성일은 다른 날보다 중요한 날이다.  모든 날은 다 같다(5-9).  이처럼 팽팽하게 대립적인 두 그룹이 -작게는 네 종류다- 교회에는 실재한다.  이것이 교회다.  지상의 교회는 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럼 거기서 '열중쉬어!'인가?  혹은 이런저런 잔소리 말고 그냥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되는가?  아니면, 고양이 꼬리를 서로 묶어서 인위적으로 하나 되게 하는 식으로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 되었습니다!" 그러면 끝인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문제의 해법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음식 문제(1-4)

구약의 음식(정결)법을 따라 고기나 채소를 먹는 문제는 다룬다.
아마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 문제에 민감했을 것 같다.  믿음의 사람은 다 먹고(A), 믿음이 약한 사람은 가려서 먹었다(B).  그런데 로마교회에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바울은 어느 한쪽을 희생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A는 B를 업신여기지 말고, B는 A를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친다(3a).  그는 해답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A나 B의 입장에 선 사람에게서 찾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에 주목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A나 B의 사람 모두를 다 받아주시는 분이시다(3b).  A와 B는 서로 업신여김과 판단의 관계에 있지만 하나님은 용납으로 둘 다를 만나 주신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B를 버리고 A만으로, 또 그것으로 통일(획일화)시키지 않으신다.  각각의 개성, 성품, 기질, 수준, 깊이, 양식,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신다.  인위적으로, 기계적으로, 강압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으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A나 B 모두는 다 '종'이라고 말씀한다(4a).  믿음이 좋은 A만 종이 아니다.  B도 종이다.  A는 높은 종이고 B는 낮은 종이 아니다.  결코 A와 B 모두를 차별(차등, 구분)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같은 종끼리 어찌 종이 종을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다(10).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그럼에도 믿음의 높낮이가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도록 권고하신다 : "믿음이 약한 사람을 계속하여 따뜻이 맞아 주라. 그의 의견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1)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A)에게 말씀하신다.  B를 따뜻하게 맞아 주라고, 교제와 관계의 만남을 끊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B의 의견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용납하라고,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다.  탕자를 다시 맞이해 주는 아버지, 당신처럼 살라 하신다.  나 역시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A에 있음을 잊지 않기를 기대하신다.
 


성일 문제(5-9)

특별한 날(절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문제를 다룬다.
믿음으로 살지만 그래도 어떤 절기나 안식일이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다는 쪽이 있고, 또 다른 부류는 다 똑같다는, 이처럼 두 부류가 구원신앙 공동체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 같다(5a).  이 문제를 다루는 원리는 음식 문제(1-4)와 동일하다.  역시 이 문제도 절대적인 진리의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한다.  쉽게 말하면, 목숨을 걸고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유연한 문제라면 양쪽 모두가 상생(相生, win-win)하는 방향으로 가야할 것을 말씀한다.  

주님은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 주신다(5b).  하나님은 사람을 다 똑같은 모양과 색깔로 판박이처럼 찍어내지 않으셨다.  그리고 일단은 결정권을 '자기 마음에 정한대로 할 일'이라고 하시면서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신다.  참 멋지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는 '주를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6) 그렇게 자기 마음에 정한대로 한다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하는 선택이 자신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A와 B 모두를 '우리'(7-8) 언어에 담아서 하나님께 드린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만을 위해' 생사(生死)를 걸지 않는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생(生)과 사(死)가 있을 뿐인 주의 소유된 백성이다(9).  때문에 A든 B든 우리 모두는 서로 아옹다옹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된다고 말한다.  



부스러기 묵상

복음의 본질인 진리 문제는 결코 타협이 없다.  
그래서 생명 걸고 순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건덕의 문제는 유연하게 처리한다.  이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구원신앙 원리의 핵심이다.  너가 나와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를 나처럼 만들려고 하는 식의 이기주의(간섭, 압력)도, 그렇다고 내 방식대로 만을 주장하는 배타주의(무지, 거부)도 해법이 아니다.  서로 다른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는 A와 B 모두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사 우리 모두의 주님이 되셨다(9).  때문에 우리 서로 형제들끼리 비판하고 업신여기며 살지 말자고 권고한다(10a).

바울의 탁월성이 빛나는 부분이다.  자유함으로 맡겨진 건덕의 문제를 영원한 진리인 십자가의 복음의 빛에 비추어 바라보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 "모두가 다 심판대에 설 것을 알고 살라!"(10b)  그렇다.  A나 B나, 우리 모두는 다같이 심판대 앞에 서서 "각각 자기 일을 낱낱이 하나님께 자백해야 할"(12) 존재들이다.  때문에 함부로, 자기 입장에서만, 내가복음으로만,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만, 이처럼 너의 허물만을 보는 것으로 살아서는 안되겠다.  심판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내가 A가 되어 다른 사람을 향해 B처럼 산다고 그를 업신여길 때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이 나를 업신여기시는 것으로 심판하시면 어떻게 될까 겁난다.  동시에 내가 B가 되어 다른 사람을 향해 A처럼 산다고 그를 판단할 때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이 나를 판단하시면 어떻게 될까 두렵다.  하나님도 A와 B 모두를 용납하셨는데 내가 감히 무엇이관대 하나님의 권한인 심판자의 자리를 넘본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비판하지 말라."(마7:1-5)는 말씀을 다시금 깐깐하게 읽어보는 아침이다.  주님도 이 아침에 나의 좋은 점만을 보시겠다고 하신다.  동시에 나의 나됨을 그대로 용납하신단다.  감사한 일이다.  주님은 이미(already) 나의 못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은 십자가로 다 지불하셨다.  문제는 나의 수준이기보다는 시각이다 싶다.  아직(not yet)은 주님처럼 온전하지 못한 이상, 음식(A, B)과 성일(A, B)에 속한 4/4 모두를 주님의 시각을 가지고 함께, 더불어, 섬기며, 사랑하며, 용납하며, 포용하며 살아야겠다.

나는 오늘 말씀을 통해 매우 귀중한 신앙연습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처럼 '따뜻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야겠다(1).  나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닌 이상 말이다.  주님이 당신과 전혀 다른 나를 용납해 주셨듯이 말이다 : "주님,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생명의 만나 항아리에 맛깔스럽게 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따라 싱싱한 만나(MANNA)의 맛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참 기대되는 아침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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