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 Romans

2000/10/18 (20:42) from 210.219.128.190' of 210.219.128.190' Article Number : 24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2364 , Lines : 62
롬7:14-25 | Paul@Sanctification.Kingdom



바울고백서

'나'에 대한 자전적 고백(7-25)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앞서 오직 의지할 분은 성령님임을 고백하였다 :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의한 낡은 방법이 아니라 '성령님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7:6b, 현대인의 성경).  그러고 8:1-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이름으로 사죄의 선언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본문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이 자전적 고백을 하고 있음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고 있으며, 그래서 그 상태 아래 있으면서도 '감사'한다고 말한다.  소망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화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을 향한 바울의 고백은 무엇인가?  


 우리는 율법이 영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14).
 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어 죄의 종으로 팔렸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15-17).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한다.
  -원치 않는 것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죄다.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안다(18-20).
 선한 일을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지는 못한다.
 나는 내가 바라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하고 있다.
  -이를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를 행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다.
 나는 하나의 원리를 깨달았다(21-23)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나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내 육체에는 또 다른 법이 있다.
  -이것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다.
  -나를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종으로 만들고 있다.
 나는 얼마나 곤고한 사람인가!(24-25)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는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직도 내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있다.
 아직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따르고 있다.


먼저 구조를 보면, 알지 못한다(15-17), 안다(18-20), 깨달았다(21-23), 결론(24-25)으로 되어 있다.  그는 먼저 원치 않은 것을 하고 있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괴로워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죄라고 고백한다.  여전히 죄는 우리가 성화의 은총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공격해 온다.  성화 안에 있음은 죄의 무풍지대가 아니다.  언제든지 죄에게 노출될 가능성을 품고 살아간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육신의 한계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어서 바울은 자기 육신 속에 선을 원하기는 하지만 선과 선행은 없고 원하지 않은 악행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 죄 때문임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깨닫는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 안에 악이 함께 있다는, 속으로는 하나님을 법을 즐거워하지만 자신 안에는 또 다른 법이 있고, 그래서 그 법과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마침내 실존의 탄식을 토로한다(24) :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절망의 선언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의 최종 선포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곧바로 그는 '감사'의 고백을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고 있다.   



부스러기 묵상

본문은 '나'란 인물을 현재 시제(時制)로 다루고 있다.  
이는 과거 시제(7-13)와 분명하게 구별된다.  한편 다른 곳에서도 바울을 지칭하는 '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용례(9:3, 11:1,13)에서 볼 때 아마도 바울 자신의 자전적(自傳的) 고백인 것 같다.  그는 칭의 이전의 인간,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을 다룰 때 이 고백을 첨언하지 않았다.  그는 칭의 이후, 성화의 거룩한 행진 안에 있는 인간을 이야기하면서 자전적 고백을 기술한다.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칭의와 성화의 은총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별 의문이 없다.  그래서 이 고백은 칭의 이전의 자신에 대한 회상쯤으로 가볍게 처리해 버리고 싶지 않다.  나 역시 바울의 고백이 충분히 이해되고, 공감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칭의와 성화의 은총 안에 있는 사람, 그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는 무엇을 통해 이 은총의 시간표를 채워가고 있는가?  이 은총 안에 있는 것은 곧 죄와의 완전한 결별 상태인가?  죄가 넘보지 못할 정도로 인간이 성화의 끝 지점인 영화에까지 장성해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인간이다.  인류는 아직 죄 아래 있다.  아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표는 재림 이전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누이 '의인된 죄인'이 우리의 정체(identity)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칭의와 성화의 길을 걷는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칭의와 성화의 은총 안에 있는 '자신'의 어떤 힘으로 말미암아 이 은총의 길목을 통과하거나 유지하거나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믿고 있다.  이 무한하신 은혜와 축복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현재는 바울의 자전적 고백(7-25)과 일치하는 공통분모가 오히려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칭의가 내 힘(선행, 행위, 율법)으로 되지 않은 것처럼 성화 역시 죄사함 받은 인간 자신 안에서 나오는 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죄(6장)와 율법(7장)으로부터 해방된 칭의와 성화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래서 8장에서 성령님이 전면에 -7:6은 성령님의 예고편이다- 등장하시는 것이다.  바울의 희망은 오직 성령님이다.  그래서 내적인 영적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도 '감사'하는 역설의 신앙으로 서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7장의 모습인 나를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도 역시 그렇다.  그리고 절망한다.  어쩔 수 없는, 별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 모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아파하고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 "나는 이러고도 그리스도인가?"  어쩌면 구원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죄행(罪行)을 구원 받은 내가 힘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할 때를 동시에 목도하면서 말이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고,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내가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갈 수 없고, 내가 나를 완전한 인간으로 재생산할 수 없고, 내가 나를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 수 없고, 내가 나를 저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는 존재임을, 그래서 바로 그 역설의 자리에 서 계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며 산다.  

죄가 나를 그리스도 밖으로 이끌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의 자리에서 의의 자리로 이끄는 분이심을 믿는다.  나는 나를 절망하게 만들지만 주님을 나를 소망하게 만드시는 분이시기에 7장의 시간표 안에서도 나는 8장을 본다.  성령님의 임하심을 본다.  실존의 몸부림, 그 언덕에 펄럭이는 성령님의 깃발을 본다.  이게 나의 유일한 희망 아닌가.  비록 오늘 역시 7장의 실존에 허우적거리겠지만 성령님을 대망하면서 나의 7장을 성령님의 8장으로 덮어가실 그 은총을 인하여 감사한다.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