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 Romans

2000/10/18 (20:31) from 210.219.128.190' of 210.219.128.190' Article Number : 17
Delete Modify 김충만 (cmkim@namseoul.org) Access : 1896 , Lines : 47
롬5:6-11 | 새로운 인간



우리의 정체(identity)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1:18-3:20)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재(不在) 가운데 있는 인간이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3:21),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칭의의 은총 아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졌다(5:1- ).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로 존재케 된 인간, 그는 누구인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사랑해 주신다.
 우리가 아직 시간적으로 불경건할 때에 사랑해 주셨다.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함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우리' 주제는 4장 마지막에서 아브라함의 칭의는 그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이다(4:23-24)에서 시작된다.  즉, 이 주제는 아브라함과 그의 '칭의'를 근간으로 한 '우리공동체'로까지 구속신학(救贖神學)이 확장되면서 진전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주어진 '칭의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우리가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연합하여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우리로 복음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칭의의 수혜자가 된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증거하는 우리는 무엇 하나 떳떳하게 내 놓을 만 한 조건이 없는 우리이다.  그러므로 칭의공동체의 회원으로서의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되지 못하는 그런 존재로서의 우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나의 잘남이나 똑똑함이나 자격이나 조건이 나를 우리 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는 우리로 칭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세인(世人)이다.  

그리스도께서 상대해 준 우리는 어떤 존재였는가?  아직 연약하고(6), 불경건하며(6), 아직 죄인이었고(8),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며(9),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다(10).  그런데 그 때에도 우리로 대우해 주셨다.  바로 그런 존재였을 때 그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다(6,8,10).  이 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다(8).  또한 칭의와 구원(9), 하나님과 화목(10), 기쁨(11)으로 나아가는 은혜와 축복을 받았다.



부스러기 묵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후한 인간의 극명한 대조가 본문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 노력, 교육, 훈련, 학습, 연습, 준비, 터득, 고행, 선행, 도덕, 행위, 양심, 착함, 철학, 득도(得道)와 같은 것들을 통해 칭의(稱義)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은 죄로 타락하여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이다(1:18-3:20, 엡2:1-3).  그래서 로마서는 계속해서 인간이 스스로 의롭게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하여 용서받은 인간, 하지만 이미 의인되었으나 아직 죄인인 인간(요5:24),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칭의와 구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으로부터 홀로서기를 하여 하나님과 동등한 인간이 아닌, 그래서 칭의 이후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 본문 식으로 하면 종말론적인 미래의  "구원을 얻을"(9,10) 존재로서의 새로운 인간이다.  

바로 그 우리로서의 나라는 점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하나님과 나의 건널 수 없는 질적 구분이 오늘 말씀묵상을 통해 더욱 분명해짐이 감사하다.  나의 마지막까지의 희망의 증거는 나 자신이 아니다.  칭의와 구원의 주인이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이 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사 사랑을 확증하시고 화목으로 부르신 예수님이시며,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 부으시는 성령님이시다.  나의 칭의 이후 역시 내 것으로부터 자가발전(自家發電)되지 않는다.  그래서 은혜 아닌가.  

내가 가진 것들은 마치 건전지와 같아서 언젠가는 소모되어 유한하게 끝나는 것들이다.  이런 나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어리석지.  그러다가 망하는 거지.  반복되는 쓰라린 경험이지만 구원 이후에 나를 내가 스스로 얼마나 믿었던가.  내 안에서 능력이 나오는 줄 알고, 이제는 내 힘으로 유지할 수 있을 줄 알고, 허락된 신앙의 방편들을 붙들고 그것들을 더 힘있게 계속해 가기만 하면 모든 신앙의 세계가 다 내 손에 있는 줄 생각했었다.  한 마디로 교만이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능력을 교만으로 오해하는 것은 불신앙 쯤으로 생각했으니까.  

이러한 이 땅의 소산과도 같은 영적 쓰레기들을 버리기 위해 '구원 이후'를 또 얼마나 많이 방황했던가.  참 많이 울었고, 그럴수록 내 능력으로 만들어가고 붙들고 있던 주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사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주님의 찾아오심을 얼마나 많이 간구했는지 모른다.  내가 하나님께 도달 해 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임하심이 신앙함의 비밀임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믿고 느리게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눈물을 지불했었다.  그래도 난 법정(신분)적으로는 새로운 인간으로 칭의함 안에 있지만 성화(수준)의 앵글에서 보면 아직도 죄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인된 죄인이다.  이미 의인되었으나 아직 죄인이다.  그 긴장 사이에 끼어 있는 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아니면 나는 이미 끝장난 인생이다.  지금은 덤으로 사는 나 아닌가.  아직도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이 멀어만 보이는 '신앙연습'이 언제 끝날는지, 아마 그 날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자는 날이겠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와 은총의 포로로 나를 묶어두심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른다.  그분으로부터 독립하여 홀로서기를 하는 것이 이제는 얼마나 저주이며 심판인지 조금씩 알 것 같다.  칭의 이후를 지금도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붙들어주심이, 더 깊게 붙들리고 싶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듦이, 그러나가 정박한 항구가 저 천국이기를, 그 날 사랑하는 주님 앞에 새로운 인간으로 서는 축복을 영광스럽게 소망하는 아침이다.  오늘도 아침이 새롭고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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