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 John

2001/04/15 (15:45) from 211.186.39.84' of 211.186.39.84' Article Number : 76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4176 , Lines : 55
(4/15) 요20:1-10 | 예수님이 누우셨던 무덤이 비어있다.



  본문 관찰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삼일만의 다시 살아남은 이미 예고된 사실이다(막9:31).
마태는 주님의 이러한 예고를 계속해서 전하고 있다(마16:21 → 17:9,22-23 → 20:18-19 → 26:2).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요한이 보인 '빈 무덤'에 대한 반응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부끄럽게도 영광스러운 첫번 부활절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빈 무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첫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녀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1a)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1b) 난 이후에 그녀가 보인 반응이 상당히 의아스럽다.  20장의 전체 정황상 그녀는 부활을 믿고서 무덤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2,11- ).  무덤은 비어 있으며, 거기에 주님의 장사된 몸은 보이지 않고, 그럼에도 그녀가 생각해 낸 것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어요."(2)  나는 지금 믿고 있는데 마리아는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장사된 몸이 부활하심이 아닌 죽은 모습 그대로 다른 장소에 옮겨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마찬가지다(3-10).  마리아는 아마도 정신이 없어서 무덤 안을 좀 더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 같다.  그녀의 뒤를 따라 무덤에 도착한 제자들은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5-7)을 보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틀 전(前)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사용했던 것들만 있을 뿐 정작 저들이 찾던 주님은 계시지 않았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죽어 계신 주님,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신 주님을 찾았다.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곳에서 아직 죽어 있는 시체를 찾고 있다.  이처럼 죽었으나 산 자와, 살았으나 죽은 자의 공존할 수 없는 간격을 제자들의 모습에서 만나게 될 뿐이다.

언뜻 뭔가 좀 명쾌하지가 않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계속해서 들어왔고, 지금 저들은 분명히 죽어 누워 계셔야 할 주의 무덤에서 누워 계시지 않는 몇 가지의 분명한 증거들을 보고 있는데도 단지 자신들이 눈으로 보는 사실만 믿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8).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주님을 믿는 자들이지 않은가(마16:16, 요6:69, 16:30).  그런데 아직 부활 신앙에까지는 아니다.  이게 좀 이상하다.  가장 먼저 알아보고, 믿고, 감격해야 할 제자들이 아닌가.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빈 무덤이 곧바로 믿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부활의 신앙은 부활의 주께로부터 말미암는다.  만약 부활을 가리키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증거들이 부활을 믿게 만든다면 빈 무덤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 신앙'을 가져야 옳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다.  5천명이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 있었으나 이들이 다 주님을 믿지 않았으며(6:26-27,66), 역시 자신에게 기적이 이루어졌으나 이 일을 이루신 분이 누구시며, 또한 아직 그분을 믿지도 않고 있음에서도 그렇다(9:11,25,35-38).  이미 눈을 뜨고 있고, 그렇게 한 분이 예수님임을 알고 있음에도 '기적'과 그것의 '앎'이 곧바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렇듯 빈 무덤을 보았어도,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것이 부활을 믿게 한 것은 아니다.

요한은 이것을 제자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설명한다(9).  그러고 생각해 보니 복음서에 등장하는 누구도 부활 이후에 그 사실을 '앎'을 통해 스스로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된 자들이 없는 것 같다.  도마가 이 부분의 압권이다(24-25).  또한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랬다(눅24:13- ).  신앙은 내가 발견하게나, 깨우치거나, 알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 한 일이란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안 갓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뿐이다(10).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부스러기 묵상

부활 이후의 무대에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요한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다같이 부활의 흔적을 보았는데 그 사실을 알거나 믿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돌이 무덤에서 옮겨난 것을 보고."(1b), 그리고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5-7)을 보았지만 말이다.  단 하나, 믿었던 것은 자신들의 눈으로 본 빈 무덤 안의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만을 믿었다(8).  죽으심에 이어 부활의 아침이 밝았지만 이를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은 사실이다.  믿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제자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다.  오늘 본문이 증거 하려고 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20장에서 제자들은 지금 개인적인 신앙이라는 것만을 통해서 그냥 "부활하셨다!"고 믿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믿음의 눈으로 무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즉 믿음이라는 필터와 앵글을 통해 걸러진 빈 무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실인 빈 무덤을 보고, 그 다음에 부활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이게 본문이 보여주는 순서다.  그렇다면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미 장례를 지냈던 예수님은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믿음을 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요한이 9절 밖에 있는 제자들을 통해서 증거하려는 메시지다.

부활은 믿음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이것이 부활 이후의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러고 보니까 마리아와 두 제자들의 모습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다시금 새롭게 정리해야겠다는 것을 생각하는 아침이다.  베드로가 빈 무덤을 보고서 부활의 믿음이 곧바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오직 부활 신앙은 주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나에게 믿음을 주는 게 아니라 부활은 믿음(신앙)의 영역임을 새롭게 묵상하는 아침, 부활의 주님이 나 심령 안에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실 때 부활의 '사실'은 '신앙'으로 부활한다.  그 주께서 부활하신 나에게 찾아오셨다.  부활 신앙은 이렇게 내 안에도 시작되었다.  신앙은 사실과 상관없이 단순히 믿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도 망했을 것입니다."
    (고전15:17-18, 현대인의성경)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