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 John

2001/04/14 (10:38) from 211.175.197.44' of 211.175.197.44' Article Number : 75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4686 , Lines : 70
(4/14) 요19:28-42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본문 관찰

 십자가의 죽으심(28-30)
 십자가의 죽으심 이후(31-37)
 요셉과 니고데모(38-42)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28a)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자신을 아셨다.
이렇게 해서 곧바로 순종으로 나아가신다.  이 순종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룰12:16, 민9:12, 시22:16,18, 34:20, 69:21, 슥12:10).  이로써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하게 성취된다.  



가상칠언(架上七言)

   ①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②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⑤ "내가 목마르다!"(요19:28)
   ⑥ "다 이루었다!"(요19:30)
   ⑦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 운명하시다(마27:51-54)

주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에 눈물이 되어 박힌다.  그 참혹한 십자가를 온 몸으로 받으신 주님!  하나님의 자리에서 이 천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마침내 당신의 전부를 다 내어주신 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다!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하는데 이건 완전히 거꾸로다.  나는 아직 펄펄 살아있고, 그러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21:18a)라는 진단을 베드로와 동일하게 받고 있는 나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도 중요하지만 무엇으로 사는 게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더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십자가의 죽으심 이후(31-37)

유대인들은 이러고도 '안식일'을 지키고자 뭔가를 서두른다(31).  참으로 비정하고, 이중적인 두 얼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율법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거역하면서 안식일은 지키겠다고 하는 이들의 몰골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9:15b)를 외치던 자들이 어떻게 이번에는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야단들인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이 아닌가.  죽은 종교인의 모습, 율법주의에 찌든 생명 없는 자들의 추악한 이중성을 목도하게 된다.   



요셉과 니고데모(38-42)

주님이 아직 십자가에 계실 때는 '사랑하시는 제자'와 모친 마리아, 그리고 다른 여인 세 명이 주님 곁에 있었다(25-26).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주님 곁에 있다(38-39).  오직 사도 요한만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를 다 보고 있다(35).  역시 전혀 뜻 밖의 사람 요셉이 등장한다.  그는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隱諱)하더니"(38a)로 살았다 :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黜會)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12:42)  그러다가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서 마침내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자리로 나아온다.

그리고 니고데모 역시 주님의 장례식에 동참한다.  그는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39a, 3:1- ) 사람으로서 이번에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약 34㎏)쯤 가지고"(39b) 주님의 장례를 위해 헌신한다.  이 정도의 양이면 당시 왕의 장례에 소용되는 것이며, 동산이 있는 돌무덤 역시 왕의 장례식에 해당한다.  결국 요한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12:16,23, 17:1,5) 왕이신 주님의 장례를 놓치지 않고서 묘사한다.  가족들도 없이(7:3-5), 그리고 제자들도 없이, 하지만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람들(몇 명의 여인들과 위의 두 사람)에 의해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이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피'와 '물'이 이루시고(1:29, 6:53-58), 또한 이루실(3:5, 4:13-14, 6:35, 7:37-39) 구원과 그 이후의 풍성한 "은혜와 진리의 충만"(1:14)을 '장차 … 보리라'(1:42,50-51)의 꿈이 현실로 임하는 것을 통해 보고,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이렇게 해서 고난과 죽으심이 어떻게 영광인가를 희미하게 마나 깨닫게 된다.  고난은 이미 그 속에 영광을 잉태하고 있는 거룩한 씨앗이다.  주님은 이를 지난 공생애 기간 동안에 묵묵히 뿌리셨고, 이제 십자가에서 이를 완성하사, 마침내 그 영광을 추수하시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고 있다 :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19,21-22).   



부스러기 묵상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5b)

종종 정신나간 친구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지 못한다.
여기서 믿지 못한다함은 일단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면으로 제한할 때도 그렇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해서 신앙으로 믿는 것과 조금 구분해서 역사적인 사건이요 사실이라는 점을 좀 생각해 본다.  어떤 이들은 주님이 죽은 게 아니라 기절했다(기절설)고 억지를 부린다.  하지만 군병들이 "이미 죽은 것을 보고"(33),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34), 또한 빌라도도 예수의 시체를 요셉에게 주고 있고(38), 요셉과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40) 주님을 장사지낸 것을 성경이 명백히 이야기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성경으로 증명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럴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좀 정리하면 이렇다.  복음서의 기록 연대는 보통 A.D. 60-70년으로 잡는다.  가장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도 A.D. 80-90년을 넘지 않는다.  이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뭐 중요하냐 싶겠지만 아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A.D. 35년 경을 전후한다.  그렇다면 약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복음서가 기록되어 주님이 공생애를 보내실 때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는 말이 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A.D. 55년 경)에도 부활을 목격한 500여 증인들 가운데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太半)이나 살아 있고"(고전15:6) 역시 마찬가지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생애와 기록의 연대가 가깝고, 지금 동시대 사람들이 읽고 있으며,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는 말은 성경(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쪽으로 가는 것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천했다.  만약 어떤 책이 그의 장례식을 이처럼 기록하였다고 해 보자 : "방송은 모든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특집 방송으로 가득 채워졌으며, 서울 시민 1,200만 가운데 거의 태반이 조문을 하였고, 장례식 날에는 운구차가 지나는 행로에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민이 다 나와서 눈물로 애도를 포하며, 그야말로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 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세기적인 장례식이었다."

역으로 생각해도, 아직 바리새인들과 백성의 장로들 역시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다.  이들 앞에 허위 사실을 유포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로마의 군사들까지 개입이 되어 있으니 로마를 모독한 일까지 포함되는 거대한 범죄일 수 있다(마28:11-15).  이처럼 거짓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도덕성을 믿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대통령인 '사실'까지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를 온전치 못한 정신나간 사람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감사하게도 이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믿는 자리에 서도록 하셨다는데 있다.  '장차 … 보리라'(1:42,50-51)의 꿈이 마침내 현실로 임하고 있다.  주님의 죽으심 앞에 서서 이 영광의 부스러기를 묵상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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