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 Mark

2001/12/23 (19:06) from 211.236.201.235' of 211.236.201.235' Article Number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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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막16:1-13 | 다시 사신 그리스도
2001/12/24



  본문 관찰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가서 …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안식(安息) 후(後)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後) 전(前)에 일곱 귀신(鬼神)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후에 저희 중 두 사람…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인가?  
아니면, 초대교회가 그럴 듯 하게 만들어 낸 하나의 허구(許久)거나, 신화(Myth, 神話)인가?  이것은 질문으로써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확신에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최소한 다음의 사실들에서 그 역사성을 밝힐 수 있다.

복음서와 바울의 진술이다.  익히 아는 대로 복음서는 예수님 시대를 기록한 하나의 역사다.  이 말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무슨 말인지 간단히 말하면, 복음서는 그 기록과 예수님의 행적이라는 양자 사이가 동시대적이라는 점이다.  기록 연대, 저자들, 그리고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복음서의 기록 연대는 A.D. 50년대 후반 - 60년대 중반으로 잡는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후 약 30여 년이 지난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그들의 눈과 귀로 예수님을 만났거나, 천국 복음을 친히 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허위 사실을 보도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약 30여 년 후에 [남서울복음서] 50장 1-2절을 이렇게 기록했다고 가정해 보자 : "성탄을 앞둔 겨울 어느 주일에 연합성가대의 메시야 찬양이 시작하자 제1바이올린이 다이아몬드로 변했다.  그 빛은 온통 예배당을 비추었고, 그 다섯 현은 '빨주노초파'란색의 비취가 되더니, 활은 순금으로, 테너 솔리스트인 김충만은 천사와 같았더라."  한 번 생각해 보라.  30여 년 후면 남서울교회 설립 60주년 정도가 된다.  현재 개척 당시의 증인들로부터 설립 27주년까지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성도들이 많이 생존해 있다.  다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나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교회의 행적을 역사적으로 기술하면서 알만 한 거짓말들을 집어넣으면 그 책이 책일까.

즉, 복음서의 기록이 이와 같다.  만약 복음서가 예수님과 동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은 후에, 수 백년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과 그분의 행적을 친히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어 읽혀졌다면 혹 몰라도, 다들 시퍼렇게 살아있는 시대에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읽혀진 복음서인 다음에야 어떻게 거짓 기록을 담을 수 있었겠는가.  누가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특히 마태는 오늘 식으로 말하면 [국가정보원법]에 걸리는 내용들이다.  로마를 모독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눅1:1-4)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마28:11-15)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고전15:3-6)

부활의 증거 뿐 아니라 각종 기적과 이적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내용들이, 그것도 4복음서나 되게 기록되어 전해져 왔겠는가.  지금까지 복음서는 그 진실성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과 사상들로부터 도전을 받아왔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단 하나의 기록도 가짜로 증명된 것이 없다.  특히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았던 사람이다.  



부활을 믿지 못한 사람들(1-4,8-13)

여인들은 안식일 법에 따른 금지된 발걸음 때문에 날이 밝기만을 밤새껏 기다렸다.  그러나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거나, 부활에 대한 기대감 때문도 아니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아예 생각조차 못했다.  예수님께 바르기 위하여 사 두었던 '향품'(香品, 1b)은 시체의 썩은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죽은 시체에 필요한 향품을 가지고 간 것은 여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1)

그러니 이들에게는 눈물, 슬픔, 낙담, 비통, 절망 밖에 없었다.  그들은 산 자를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으려 했다.  주님은 이미 부활했으나 이들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지키는 것에는 실패했다.  안식일을 보냈지만 그들에게는 진정한 안식이 없었다.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으나 아직도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즉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다면 나도 여인들처럼 실패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아직도 사망의 지배를 받으며, 걱정과 염려와 눈물로 무덤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또 있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3)

보이는 돌은 염려했어도 자신들의 마음에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그리하여 부활신앙을 갖지 못하게 만든 심령의 막힌 돌을 치우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니 이처럼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불신앙과 상관없이 부활은 이미 실재가 되어 있었다.  단지 아직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4)  돌은 이미 옮겨졌으나 이들의 마음에 있는 불신앙의 돌은 아직 그대로 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여인들이 염려하며 무덤을 향해 오고 있는 기간은 이미 돌은 옮겨져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해결하셨음에도 아직 그 사실을 알지도, 믿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불신앙을 가리킨다.  나에게는 이러한 무지는 혹 없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영적 무지는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낙심한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는데도 아직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아직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이와 같다.  이미 주님은 문밖에 서서 내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서 나의 찾아오셨다.  그러나 내가 무지하고, 믿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여 여전히 내 마음의 문밖에 서 계실 수 있다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나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구원을 받았으나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할 때 그렇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래서 더 중요한 것, 문제는 믿음이다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3)  

그렇다면 이미 치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무엇이 나와 주님 사이를 그토록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이 장벽을 넘어 설 것인가?  주님이 살아나셔서 나타나셨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한 그를 믿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 이유를 '믿음'에서 다시 깨닫게 된다 :

   "그들은 예수의 삶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1)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에게 나타나시니 …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12-13)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頑惡)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4)



부활하신 그리스도(5-7)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  부활하셨다.  그분은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  주님은 사망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다.  나는 이 사실을 믿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론이 아니다.  실제요, 체험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인격적인, 또한 신앙고백적인 만남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지 못한다.  또한 영접하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예수님 따로 나 따로, 가정 따로 교회 따로, 신앙 따로, 직장(사업) 따로, 예배 따로 생활 따로 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신앙의 맛을 알지 못한다.  믿음과 의심은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1:6-8)



부스러기 묵상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함으로써 부활신앙이 생길까.
즉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 밝힌다고 해서 부활신앙이 가능해지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분명히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다시 말하면 실존하는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사셨다는 것을 역사 교과서에서 밝혀준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들이 '믿음'(신앙)을 갖게 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아는 것과 반대되는 하나의 기적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중요한 것은 '믿음'(Trust)이다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3,6)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아직도 나와 주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악과 불신앙의 돌을 치우자!  막혀 있는 돌 너머에 계신 부활하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자!  이미 주께서 값없이 은혜로 막힌 돌(담)을 헐어 주시고, 당신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주셨는데 나의 못남과 불신앙이 주께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큰 불충(不忠)인가.  돌마저도 내 힘과 능력으로 치우도록 하시지 않고 이미 은혜로 하늘 가는 길을 열어주셨으니 믿음으로 당당하게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 쉬운 길을 우회하지 말자.  멈추어 서서 소일하지 말자.  가지 않겠다고 투덜거리지 말자.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말자.  주님과 함께라면 뭐가 겁나고, 어렵고, 부족하다 할 수 있으리요.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사 나를 이끄시니 신바람 나게 날마다 부활의 아침을 살아가자.  지금은 "심히 놀라 떨며 … 도망하고 무서워하여"(8a) 살아갈 때가 아니다.  더욱 부활의 주님을 따라 살면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8b)면서 산다면 얼마나 망신스러울까.  지금은 '두 사람'(12)처럼 부활의 소식을 고하면서 살아야할 때다.  내게 주신 복음의 등불을 등경 위에 둘 때요, 부활의 복음을 드러낼 때다(4: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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