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 Mark

2001/12/21 (22:37) from 211.236.201.235' of 211.236.201.235' Article Number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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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막14:53-72 | 아직 베드로에겐 희망이 있다.
2001/12/21



  본문 관찰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대제사장 -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 -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대제사장 -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비자(婢子) -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 -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비자(婢子) - 이 사람은 그 당(黨)이라
 베드로 - 또 부인하더라
 곁에 서 있는 사람들 -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
 베드로 -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대제사장 앞에서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지만 그래도 둘은 좀 달랐다.
마가(51-52)와 베드로(54,66- )인데 전자(前者)는 붙잡혀 끌려가는 주님을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도망하였고, 후자(後者)는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주님이 당하신 일을 지켜보았다(54).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린 베드로의 모습은 (47) 이제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거짓 증거'들이 난무해도 불이나 쬐고 있고, 자신을 지목하는 말에 거짓말로 역시 거짓 증거를 하고 있는 베드로를 만난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주님만이 진리를 말하신다(62).  죽음이 자신을 맞이한다 해도 말이다.



거짓 증거(53-6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증거를 찾았다(55).  그리고 거짓 증거를 부추긴다(56-59).  거룩한 절기 중에(1),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온통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저런 고소가 이어졌으나 증거들 끼리도 서로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웬만하면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어서 써보려고 했을텐데 아마도 자기들이 듣기에도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소리에 불과한 모양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늘 그렇다.

한 사람을 죽이고, 패가망신(敗家亡身) 시키는 것을 위해 '거짓 증언'을 세우기까지 하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까.  왜 사람들은 남을 잘못되게 만들어서까지 자기 목적을 성취하려들까.  그것도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말이다.  주님은 이런 모리배들 앞에서 잠잠하시기만 하다(61a)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그러시지 않으셨다 :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2)  자신이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할 자 그리스도임을, 육신을 입고 죽기까지 순종한 낮아짐에 곧 하나님의 우편으로까지 높아짐의 시작임을, 그리고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재림주임을 선언하신다.  주님은 잠시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거짓 증거를 하는 편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영원한 영광을 위해 참된 증거를 선택하셨다.  

정말 무엇이 사는 길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의 노래일까.  주님은 이렇듯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을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a)  그러니까 거짓 증거자들이 덮어씌운 죄목(罪目)처럼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이다.  사람들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죽으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다.  지금 그가 죽음의 문을 향해 당당하게 입장하고 계신다.  



베드로(66-72)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b)는 위대한 고백에서부터 추락하더니 급기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마지막 세 번째 때는 자기를 저주까지 하면서 맹세하는 가운데 주님을 부인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렇게 호언장담(豪言壯談, 29,31)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어찌된 게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마가는 어쩜 이걸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말은 있으나 그것을 유지할 능력은 없었다는 것을, 그것은 그가 기도해야 할 시간을 졸음으로 허비한 것 때문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위해서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 말이다.

그럴 수 있다.  말은 많았으되 능력이 없는 경우는 앞에서도 있었던 얘기다(9:18,29).  첫 번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것이 경고의 나팔인 줄 알지 못했다(72a).  그리고 두 번째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마가는 여기서도 매주 중요한 교훈을 기억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베드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것이 닭 울음이었다기 보다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그는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 주님을 부인할 순간 주께서 돌이켜 자신을 보시는 주님의 눈과 자신의 눈이 교차했었고(눅22:61a), 그러자 주의 예언의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30,72b).

말씀은 이처럼 회개의 진정한 원인이다.  추락한 베드로에게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연약할 때, 실패와 좌절의 늪에 빠졌을 때,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 없는 자인가를 목도할 때, 자신의 말조차도 지킬 여력이 없어졌을 때, 자신이 사는 것을 위해 주님을 모른다는 거짓말을 거침없이 할 때에도 주님은 당신의 사람을 모르신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이처럼 무너져 있을 때 만나 주시는 주님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다.



부스러기 묵상

인간이 하나님을 죄인이라 선언하고 죽이는 일, 이것이 현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정죄한다(64, 레24:16).  인간을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주신 은혜의 선물인 말씀이 이상하고 망측한 부메랑이 되어 주님의 심장을 겨냥한다.  이게 인간들이 벌이는, 그것도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자행하는 범죄의 전모다.  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찾아 예수님을 죽이는 곳에 적용할 줄은 알았어도 자신들을 향해 죄인이라 명하는,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는 귀와 눈과 마음을 닫아버렸다.  

인간이 말씀이라는 잣대(CANON)를 자신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위해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정죄하고, 못살게 훼방하고, 자의(自意)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기를 일삼는 것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말씀이 얼마나 악용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정말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삿21:25)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예수의 복음이 아닌 [내가복음]이라는 제5복음서를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서 세상을 온통 이런 안경으로만 바라보려는 심각한 영적 공항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씁쓸하게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만 돌을 들기에는 뭔가 자각 증상이 느껴진다.  나를 고치고, 돌아보고, 새롭게 하고, 성숙과 성장을 도모하고, 거룩을 연습하는 이런 일들을 위해 말씀의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는 일에 게을렀다면 바리새인들의 오류의 싹이 내 영혼 안에 자라고 있지 않다고 자신할 수 없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칼같이 적용하는 못된 마음 또한 이제는 꺾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내 안에 차 오르는 영적 중압감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언제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씀만을 찾아 나서고, 그래서 발견하기라도 하면 무슨 대단한 적용이라도 되는 냥 자위하는 못난 습관과 이쯤해서 이별해야겠다.  

나를 나 스스로 고치고, 돌이킬 수 없기에 베드로에게처럼 말씀이 생각나는 그런 은혜의 부스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에게는 희망이 없지만 말씀이 내 마음 밭에 떨어지고, 이미 내 영혼의 창에 걸려있는 말씀이 생각난다면 나에게도 희망은 아직 남아 있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이 생각나서는 정말 곤란하다(64).  바라는 것은 베드로처럼 말씀의 은혜가 다시 새롭게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범죄하고 무너지지만 말씀은 언제나 그런 자리에 처해 있을지라도 찾아와 주신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복이고 은혜인가를 베드로의 통곡에서 조금이기는 하지만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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