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 Mark

2001/12/20 (22:32) from 211.236.201.235' of 211.236.201.235' Article Number : 27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1571 , Lines : 69
(1/1-3) 막12:28-44 | 신애(神愛)와 인애(人愛)
2002/01/01-3



 본문 관찰

 서기관 -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님 - 첫째는 이것이니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포장지는 좋은데 내용물은 역시 시험이요 올무다(마22:15,35).
바리새인이기도 한 서기관은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났다.  이런 사악한 의도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그것을 통해서도 선한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바꾸시는 주님이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서기관은 12장의 시비꾼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주님과의 만남 이후에 보여준 그의 변화와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34)는 말씀이 좀 난해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나님 사랑(29-30, 신6:4-5)
이웃 사랑(31, 레19:18)

   "바리세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10:2)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11:18a)
     ①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11:27-12:12)
     ②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12:13-17)
     ③ "일곱 사람이 … 살아날 때에 그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12:18-27)
     ④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12:28-34)

이런 간교함에서 나온 질문들이다.  '입술발림'에 불과한 말들을 토해내는 일에 능통한 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방법으로든 예수님의 가는 길을 진흙탕으로 만들겠다고 아우성 치는 자들, 첫째 되는 계명마저도 이론적으로만 묻고 있는 자들, 율법이 토론의 주제가 될 뿐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 입술에만 율법이 있을 뿐인 직업적인 종교가들, 그토록 무수한 주님의 말씀과 기적을 듣고 보았음에도 변화되기를 아예 거부한 자들이다.  주님은 저들의 속내를 모르실 리가 없다.  다 아시면서도 주님은 오히려 사랑의 복음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랑해야 할 분이지 탐구하고, 토론하고, 인간 편에서 뭔가를 더 첨가해야 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자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對'神'계명).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다(對'人'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진정으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웃 사랑을 따라 사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 안에 들어온 사람이다.

주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에서 이를 분명히 하신다.  임금이 오른편(양, 羊)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34-36)로 이어지는 선언을 하시자 저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37-39)라며 반문한다.  이때 임금(주님)이 대답한 말이 압권이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이렇듯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포함한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유기적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나 역시 사랑을 말로 하는, 머리로 이해하는, 생각으로 동의하는,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아닌지 겁난다.  서기관은 이제 서서히 예수님의 사랑에 붙잡힌다.  그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들보다 사랑이 더 우선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으로 바뀐다(32-33).  그만큼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셈이다(34).  많은 질문들(①②③④)이 있지만 그 내면에는 주님을 죽이려는 살기(殺氣)를 품은 자들, 웃으면서 다가와 대화의 악수를 청하지만 감추어진 한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匕首)를 든 12장의 사람들에 비하면 그는 진일보한 셈이다.  주님이 이 긴 논쟁을 마무리하시면 정말 건강한 삶은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현장(field)으로 가신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다(35-44).

여기 이론(토론)에서 생활로 넘어오는 한 사람이 있다(32-34).  그는 '시험'하기 위해 주님을 찾았으나 말씀을 듣고 변화되기 시작한다(28 → 29-31 → 32-34).  하지만 12장에는 여전히 38-44절의 비석처럼 서 있는 '서기관'(38-40) 식으로 사는 자들, 그리고 '부자'(41-44) 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가득차 있다.  저들에게는 질문만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주님을 시비(是非)하여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메시야 사역을 딴지 걸려고 하는 흉악한 이리처럼 말이다.

진짜와 가짜의 판별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겉푸름에 능한 자들은(38-41) 일단 아니다.  이중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상대하는 자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거드름을 피우는 교만한 자도 아니다.  주님은 진심 어린 마음을 보시며, 자신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삶을 가진 자를 주목하신다.  그리고 그의 손을 들어주신다.  네 번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11:27-13:34), 그처럼 대답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논증을 하신 후(13:35-37), 결론적으로 정말 바른 삶은 무엇인가를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삶의 현장을 통해서 확증하신다(13:38-44).  

서기관과 같은 옛 사람들의 낡은 부대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새 술을 담을 수 없다는, 그렇다면 다윗의 주(Lord, 36, 시110:1)이신 자신만이 진짜 해답임을 진심으로 '아멘'하게 된다.  새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온 예루살렘이 아무리 주님을 배척하고 거부한다할지라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법칙은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 주님은 이 일을 위해 당신의 온 몸을 십자가에서 드리시겠다 하신다.  

한 가나한 과부의 전적인 헌신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이 귀하게 받으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처럼 '입술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인격이며 삶이다.  이를 한시도 잊지 말자.  나와 바리새인이 달라야 하고, 그 다름의 기준은 주님 말씀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생활복음]이다.  주님은 지금 나에게 이처럼 일상생활의 영성에서 승리하며 살기를 기대하신다.  이미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바리새인들의 옛성품이 나의 삶을 좀먹지 못하도록 좀 더 진심 어린 발걸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야겠다.  



부스러기 묵상

'하라!'(248) + '하지 말라!'(365) = 율 법(613)
전통적으로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613 개조 항목으로 분류하고서, 그 중에 금지조항을 365 개로, 그리고 긍정적인 명령을 248 개로 각각 정해 놓았다.  그리고서 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큰가를 갑론을박(甲論乙駁) 하는 것을 즐겼다.  좀 다른 얘기지만 중세(中世) 때 수사들은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을까를 토론했다고 하니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저들은 예수님까지를 이런 분위기에 끌어들인다.  목적은 역시 뭔가 꼬투리를 잡아 주님을 시험하기 위함이다(마22:15,35).

복음이 가는 길에 무수한 '반대의견'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여유 있게 저들을 따돌리신다.  그리고 율법의 죽은 조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을 끄집어 내신다(10-11,26,29-31,36).  시비꺼리를 찾고, 또한 자신들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말씀으로만 인용하고 써먹는 한심한 바리새인들에게서 환멸을 느낀다.  하나님을 이처럼 대접하며 살아도 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미 저들에게는 하나님도, 진리도, 예수님도 없다.  오직 자신들만이, 그것도 상좌와 상석에 앉아 문안 받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가.  하나님에게서 이웃의 탄식과 고통의 소리를 들으며, 이웃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보여주는 자로 승리하고 있는가.  어느 것 하나 변변한 것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자신 없는 물음들이 아닐 수 없다.  속푸름은 하나도 없고 오직 종교적인 여러 무늬들만을 덕지덕지 발라 놓은 참으로 촌스러운 겉푸름만 난무하는 12장이다.  오직 세 사람만이 점점 분명한 이미지로 클로즈업된다.  주님의 설교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온 서기관(32-34), 가난한 생활이지만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린 한 과부(42-44), 그리고 예수님으로 점차 그 빛이 밝아진다.  나는 누구인가?  정말 주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 자인가?  주를 향한 타는 목마름으로 두 렙돈 같은 마음을 들고 주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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