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 Mark

2001/12/20 (22:31) from 211.236.201.235' of 211.236.201.235' Article Number : 23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1557 , Lines : 71
(12/29) 막11:1-26 | 예수님은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신다.
2001/12/29



 본문 관찰

 종의 영광(1-11)
 종의 심판(12-26)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2-14,20-26)
   성전을 청결케 하심(15-19)



종이신 왕(王), 종이신 심판주(審判主)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는 왕이시다.  그는 또한 심판자이시다.  비록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시며 왕이시며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이시다.  그는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신 어린양이시며 메시야이시다.  마침내 이 비밀이 '호산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왕의 행차에서 밝히 드러난다.   



종의 영광(1-11)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b-10)

종의 섬김은 마침내 메시야로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  예루살렘 입성은 이러한 왕이신 예수님 자신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를 위해 나귀를 타시고(2-6)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다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지금까지는 자신의 정체를 의도적으로 숨기셨다(1:45, 5:43, 8:30, 9:9,30).  그러나 이제 때가 되었고, 급기야 섬기러 오신 종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되었다.  



종의 심판(12-26)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무화과나무처럼 열매가 없고, 내적으로 성전처럼 부패해 있다.  따라서 심판은 당연한 수순이다.  저들은 왕을 맞을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겉만 번듯할 뿐만 아니라 속은 더욱 추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다.  어찌 보면 무화과나무나 성전이나 진정한 종말론적 심판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예루살렘의 형편은 이를 알아 볼만큼, 또한 깨달을 만큼 호흡이 남아있다고 기대해도 될까.

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2-14,20-26)

지금껏 주님은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는 것들을 채워주심으로써 소망의 불씨를 살리셨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주렁주렁 열게 하심으로써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이처럼 풍성할 것을 소망케 하시지 않을까 기대가 됨직 하다.  하지만 예상은 여지없이 어긋나고 말았다(14) : "이제부터 영원토록 …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이 저주는 다음 날 그대로 성취되었다(20-21).  잎이 무성하고 열매는 없다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identity)이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일종의 본보기 역할인 셈이다.

종으로서의 섬김은 기약 없이 계속되는 무한궤도가 아니다.  생명을 주면서까지 섬겼으나 잎만 무성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경고를 지금 하고 계신다.  이처럼 끝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주께서 하신다고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만 심판의 대상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22-26).   

② 성전을 청결케 하심(15-19)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7:11)

성전이 시장 바닥과 다를 바 없다(15).  세속과 거룩의 경계선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성전은 있고, 제사장도 있고, 제사도 있고, 제물도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이나 형식과 같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부재(不在)하시고, 거룩과 성결과 생명은 이미 떠난 지 오래다.  그래서 사람 냄새만 난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숨결과 그분의 임재에 따른 거룩한 만남은 없다.  성전을 이용해서 자기 배만 채우는 모리배들로 가득하다.  성전의 주인이 오셨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시간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모독을 받고 계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종교놀음'을 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이처럼 언행하신 주님이 오늘 우리시대를 보시고서 그러시지 않으리란 아무 보장이 없기에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어찌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이용해서 결국 자기 이익이나 추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성전을 꾸미며 살아가고, 그걸 더 키우고 또 지키기 위해 위장된 가짜 거룩으로 진짜를 밀어내고, 결국 그것도 부족해서 예수님 없는 성전을 꿈꾸는 기득권자들에게서 무엇을 더 기대하랴(18).

나는 기도하는 집인가, 아니면 아직도 강도의 소굴인가.  솔직히 두렵다.  내 한 영혼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목회(牧會)를 한다는 것이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주님의 진단 앞에 설 때마다 부끄럽고 가증한 목록만 추가되는 것은 아닌지.  내 영혼의 뜨락을 이제 좀 깨끗하게 단장해야 할 것 같다.  

강도가 출입해서 그렇게 되기도 했겠지만 내가 그렇게 되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 역시 책임이 면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적(敵)과의 동침을 이제는 청산해야겠다.  이제는 주님처럼 "쫓아내며 … 둘러엎으시며 … 허치 아니하"(15-16)여야겠다.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무엇보다 주님을 위해서 말이다.



부스러기 묵상

   "복 있는 사람은 …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시1:1-3)

무화과나무의 잔상(殘像)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내 영혼에 심기운 나무는 건강한가.  주님이 찾으실 때 내 마음밭에 자라는 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을까.  시편 기자는 이를 위해 "아니하며 … 아니하며 … 아니하고 … 하여 … 하는"(시1:1-2)이라는 영적 법칙을 조심스럽게 공개한다.  분명해야 할 것 같다.  양다리 걸치고는 안된다 싶다.  

아닌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고, 옳은 것은 스데반처럼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준비를 내 인생이라는 나무에 함께 해 가지 않으면 언제 고목처럼 쓰러질지 모르는 일 아닌가.  누가 내 대신 내 영혼과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해 준단 말인가.

주님이 열매를 찾으실 때 내게 맡겨진 달란트가 주님께 드려지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로 이어지는 축복의 반열에 서고 싶다.  인생은 지우개로 쓰다가 틀리면 다시 지우고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후진기어도 없으며, AS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다 노출되고 있으며 언제가 밝히 드러난 때가 있다.  

그날이 오기 전에 내 영혼이 후울쩍 성장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주님께 드려지기를 소망한다.  이제 더 놀고, 한가롭게 뒤척일 시간이 없다.  인생의 반환점이 저 앞에 보이는 지금, 이제는 [기도하는 집]으로 주님 앞에 나를 봉헌하고 싶다.  이렇게 살다가 주님을 만나야지.  천국에서까지 "그때 이랬을 껄!" 하며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고 소중한 생(生)이다.  지금은 다르게 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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