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 Mark

2001/12/17 (18:54) from 211.236.201.235' of 211.236.201.235' Article Number : 12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1732 , Lines : 90
(12/17) 막7:1-13 | 참된 정결을 생각한다.
2001/12/17



  본문 관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사람의 유전 vs. 하나님의 해답

바리새인들에게는 자기 방식대로 지켜오는 특별한 전통이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그들의 전통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말씀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우위법칙]을 철저하게 지켜오고 있었다.  자기들의 전통에 말씀이 불리하게 작용하면 말씀마저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빼거나 더하는 일을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  또한 이 전통을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들처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병이다.  결국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부정하다'고 정죄한다.  모든 판단의 기초, 혹은 근거가 자기들의 전통이다.  

바로 이런 함정(2-5)에 제자들과 예수님이 빠지게 되었고, 이 문제를 통해 예수님은 '고르반'(Corvan)을 예로 들어서 바리새인들의 교묘한 이중성을 여지없이 들추어 내셨다 : 즉, "너희들은 정결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왜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너희가 고르반이라는 미명 하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정결법의 문제를 통해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과연 무엇이 정결인가?'의 교훈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이를 좀 더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르반'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르반(Corvan) :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11)

그럼, 고르반이란 무엇인가?  "내가 부모님께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11-12),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을 '고르반'이라 한다.  쉽게 말하면, '고르반'(성전에 바친다)이란 원래 모세의 율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바리새인들이 교묘하게 만든 하나의 악법과도 같은 전통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식으로서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면하고 싶으면 그 재산을 성전에 바친다는 서약을 이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고르반이라는 종교적 미명 하에 불효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나의 재산이 고르반이 되었다는 말 한마디, 그러니까 성전에 바쳤다는 허위의 그 말로 부모 봉양을 회피했던 것이다.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이 '고르반 하였다'면서 율법을 거역하는 더 큰 죄악을 예수님은 결코 용납하실 수 없었다.  이처럼 당시 종교는 껍질만 남았을 뿐 극도로 타락(부패)해 있었던 것이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6, 사29:13)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7)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8-9)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행위는 참으로 위선적이었다.  이는 헛된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한마디로 '립 서비스'(lip service)만을 추구하는 한심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포장지는 하나님의 계명인데 내용물은 사람의 계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계명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들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모습이라는 말이다(입술 vs. 마음의 대비는 사람의 유전 vs. 하나님의 계명, 더 나아가 사람 vs. 하나님으로 대조를 이룬다).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종교성은 이처럼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그것이 옳은 것인 양 따라가거나 현혹되어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패망할 가능성이 많다.  정리하면,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의 기준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기준과 평가는 사람의 어떤 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은 옳다, 맞다."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이 무슨 전통을 따라 "그래야 한다, 아니다."라고 할 문제가 아니다.  한편 나에게는 바리새인들처럼 혹시 어떤 '고르반'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거나 모시고 살기를 꺼리는 경우  
    *헌금은 잘하면서 부모님께는 용돈 드리는 것을 다른 자녀에게 미루는 경우
    *교회 일 한답시고 집안 일은 배우자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
    *기도는 청산유수(靑山流水)처럼 잘 하면서 행동은 아니올시다인 경우
    *성경은 잘 알면서 신호등이나 교통 법규는 예사롭게 생각하는 경우
    *자신은 교회에 오면서 자녀들은 학교나 학원으로 보내는 경우

현대인에게는 다음 세 가지의 고르반이 더 있다.  먼저, 이기주의라는 죄의 고르반이다.  내가 잘 되고, 나에게 좋은 것이라면 어떤 것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모든 기준이 '나'다.  내가 드리는 기도의 거의 전부가 나와 자녀와 가정인 점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또한 편리주의라는 죄의 고르반이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내가 신앙생활에 편리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거기엔 관심 없고, 나의 유익과 편리만을 쫓아 철새처럼 날아다니는 신앙의 유목민 시대가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더 나아가 적당주의라는 죄의 고르반이다.  하나님께 크게 혼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당하게 드릴 것 드리고, 예배 드려줄 것 드려주고, 교회 나갈 때 적당하게 나가주면서 유별나지 않게 살자는 식이다.  성경을 알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냐니까 하나님과 적당히 거래하고, 적당한 선에서 죄 의식을 무마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적용하면서 자유해 버리는 쪽으로 길들여져가는 것 같다.  그래서 신앙의 충격도 없고, 영적 갈급함도 없고, 좀 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자 하는 '열심'마저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 버린 모습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러한 터무니 없는 생각들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일수록, 자신은 좀 꽉 막힌 사람이 아니고 자칭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강도가 강하다.  자신 역시 하나님께 할 만큼은 했다는 식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도, 물질도, 젊음도, 몸도 드리고 있으니까 이제 조금 쉬고 놀아도 이해하실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린다.  이것은 무서운 현대인의 고르반 병이 아닐 수 없다.
  


말씀 - 하나님의 해답

예수님은 삶의 양식이 사람의 유전이 아닌, 그것보다 훨씬 차원이 다른 오직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아무리 모양이 좋고, 아름다워 보이고, 박수 갈채를 받아도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전통은 무익할 뿐이다.  예수님은 '정결'의 문제를 "내 부모를 공경하라!"(10a, 출20:12)는 주제를 예(case)로 들어서 설명하신다.   

종종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관심 가운데 핵심이 아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대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부모 공경, 그러니까 '효에 대한 가르침'은 시대의 요구나 흐름의 강력한 요청 때문에, 혹은 여타 다른 종교에서 강조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도 그것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어쩔 수 없어서 성경에 편입된 것이 아니다.

부모 공경은 십계명 가운데 대인 계명의 첫 계명이다.  십계명은 크게 1~4까지의 대신(對神), 그리고 5~10까지의 대인(對人) 계명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과의 첫 계명을 바로 부모 공경, 그러니까 효(孝)에 대한 명령으로 시작하셨다는 점이다.  이처럼 부모 공경은 위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지 세상 역사 속에서 전통을 따라 땅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렇듯 효(孝) 사상은 공자(孔子)가 태어나기 1천년 전에 성경이 먼저 선언한 진리이다.  그러니까 효도(孝道)는 성경적이다.  일반 세속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범하고 있는 오류(오해)는 바로 효가 민속이나 유교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더더욱 교회에서 효도를 강조하면 마치 비성경적인 그릇된 가르침이 아닌가 색안경을 끼고 본 때도 있었다.  하나님 사랑과 부모 사랑은 갈등(긴장, 우열, 차등, 선후) 관계가 아니다.  이 둘 다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 아래 부모 사랑을 무시하거나 아예 괄호 밖으로 밀어 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서 하는 말이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된다는 식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정결의 정체다.  얼마나 가증스럽고 교활한 위선인가!



참된 정결(1)

참된 정결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고르반이라는 사람의 계명을 위해 하나님까지 마음대로 이용하는 악을 서슴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마저 수단으로 취급하였다.  인간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위해 진리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심각함이 얼마나 큰 죄이며 악인가를 생각해 본다.  

바리새인들의 정결관은 조작되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왜 이처럼 진리를, 말씀을, 하나님을 오해하고 자기 방식(전통)에 젖은 나머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에서 실패했을까?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처럼 위선적인 그들이 왜 예수님을 거부하고 사사건건(事事件件) 시비를 걸었을까.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이중성을 고발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율법을 변형시켰고, 그것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숭배하였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채우는 파렴치들, 얼마나 불쌍한 자들인가.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을까.  

정결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 오해는 전통과 말씀의 우선순위를 바꾸었을 때 발생한다.  그 결과 자신들의 전통만이 옳다는 것 때문에 이 전통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전통의 칼'로 비난하고 정죄하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떠받드는 전통은 사람들을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패배감과 죄책감만을 주는 것이 된 셈이다.  그러면서도 가증스럽게도 이렇게 말한다 :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5)

거짓 정결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만 잘 하면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첫 단추를 잘못 끼움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상한 옷차림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행세하고 살아간다.  하나님마저도 오해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해 버리는 오만함이야말로 죄의 극치이다.  이렇게 되자 자기가 누구인가를 잊어 버렸다.  즉,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롭다고 생각한 것만큼 자신들의 전통 밖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판단하고, 비난(비판)하는 것으로 흘러 버렸다.



부스러기 묵상

바리새인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는 중이다.
죄에서 비롯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전통'이 인간을 파멸시키는데 얼마나 큰 효력이 있는가를 목도하게 된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이미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들이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율법을 의도적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편리할 대로 짜깁기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적용하여 정죄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도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적용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사실 나를 긴장시키기에도 충분한 부분이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자기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그것도 예수님께 말씀대로 살아달라고 항변할 수 있단 말인가.  지극히 보기 드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비극과, 그 말로(末路)를 나는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목도하게 된다.  내 입에 거품을 물고서 바리새인들을 성토하기 이전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가증한 면, 회칠한 위선, 철저한 이중성을 통해 내 안에도 혹시 이런 죄악의 씨앗들이 자라고 있지는 않는지 비추어 본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정결은 무엇일까.  정결은 어떤 예식(의식, 형식)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중시한 나머지 유전을 지키는 것이 곧 경건이라고 생각하였다.  경건의 내용은 버리고 경건의 모양만을 취한 것이다.  경건을 가장한 위선을 자행한 셈이다.  이처럼 의식 안에, 전통 안에 하나님과 경건을 제한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한 정결은 말씀을 그대로 지키며 사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결합니까?"라는 말은 "말씀대로 살아갑니까?"와 같은 말이다.  참된 정결은 말씀이다.  더 구체적인 것은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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