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나 | Jo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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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5 (09:56) from 211.236.201.235' of 211.236.201.235' Article Number : 5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1693 , Lines : 71
욘1:17 | 듀엣(Duet) - 하나님은 이미지만 요나는 아직이다.
2001/07/25



 본문 관찰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3일을 고기 뱃속에 있었다(표준새번역).



물고기뱃속신앙훈련학교

   [1장]        여호와(1)    ~    여호와(17)
   하나님       말씀(1) → 대풍(4) → 제비뽑기(7) → 물고기(17)
   요 나         그러나(3) → 그러나(5) → 대답1(9) → 대답2(12) → 15절
   그 사람들  두려워하여(5) → 두려워하여(10) → 두려워하여(16)

요나는 이미 바다 속에 있으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는 대풍 → 선장 → 제비뽑기 → '그 사람들'(선장, 무리) → 바다 속에, 그리고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참으로 당당하다.  죽음, 그것도 자살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던 자리에서 어느 틈에 오만 잡동사니로 가득한 물고기 뱃속 안 후미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요나를 발견한다(1 → 17).  마침내 무대는 물고기 뱃속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1장 어디에서든 요나를 붙들고 계신다.    



요나 스타일(style)

요나는 선지자의 사명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죽음이라는 자살을 선택한다.  선지자가 말이다.  이를 어찌 설명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참으로 혼돈스럽다.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러고도 살아있고, 그런 인생들을 하나님은 그대로 살려 두신다.  요나 같은 사람도 그렇지만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이렇듯 황당하다 못해 철면피와 같은 인생들을 그대로 받아주시는가 말이다.  요나만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면 좀 야속하고 분하겠지만 '요 나!' 또한 이처럼 살고 있고, 하나님은 지금껏 나를 살려두고 계시지 않은가.  인생은 요나처럼 언행(言行)해도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구약의 요나나, 신약의 '요 나!'만이 아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살았음에도 하나님이 요나처럼 대접해 주신 사람들이 많다.  이걸 좀 생각해 보고자 한다.    

① 갈멜대첩의 선지자 엘리야(왕상19:1-21)

엘리야는 하나님이 위대하게 쓰신 사람이었고, 바알의 거짓 선지자들과 벌인 갈멜대첩이라는 영적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탁월한 선지자였다(왕상18:1-46).  그런데 이 엘리야가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19:3-4)라고 몰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라고 해서 위기와 시험이 없는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요나는 사명 뒤에 찾아온 위기였고 엘리야는 승리 뒤에 찾아온 위기였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지만 인간은 그것을 위기로 바꾸어 버린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런 그를 일용할 양식(왕상19:5-8)과 생명의 양식(왕상19:12,15-18)을 통해 변함없이 찾아오셨고, 그래서 그를 선지자로 다시 회복시키사 파송하신다.  그는 다시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이것은 요나의 하나님에게서도 관찰된 동일한 섭리다.

② 선지자 하박국(합1:1-4,12-2:1)

선지자이면서도 하나님께 항의와 도전에 가까운 상한 감정의 질문을 가진 하박국이었다.  그는 자기가 이해되지 않으면 먼저 화부터 내고, 그걸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투덜거린다.  선지자가 말이다.  그는 악인의 형통을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 생각과 다른 분이시라고 생각하고선 일방적으로 자기 말을 쏟아 놓는다.  그리고 급기야 하나님과 대결한다(합2:1).  하나님은 그럼에도 그런 선지자를 찾아오사 말씀하심으로 그를 깨우치신다(합1:5-11, 2:2-20).  그러자 그는 요나처럼 기도하는 자로 자신을 낮춘다(합3:1- ).  역시 요나와 동일한 패턴이 발견된다.

③ 탕자 형제들(눅15:11-32)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집밖의 탕자'가 된다.  아버지 따로, 자기 자신 따로라는 선택을 통해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선언한다.  그리고서 그 자신의 다시스('먼 나라')로 내려간다.  '집안의 탕자'인 큰아들도 같기는 마찬가지다.  역시 그도 아버지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다.  아버지가 좋아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에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역시 자기 방식대로 언행한다.  그는 자기 동생이라는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한편 이 두 아들을 설득하는 아버지는 요나의 하나님과 동일하다.  아무도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결코 아버지로서의 자리와 역할과 사명을 포기하거나 바꾸지 않으신다.  지금 요나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요나 스타일(style)로 살아가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초신자들보다는 소위 하나님에 대해서 좀 안다는 사람들일수록, 성경을 많이 공부했다는 사람들일수록, 비교적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 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임재와 찾아오심을 경험한 선지자임에도 요 모양 이 꼴로 실패한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자신은 자기가 잘못되었거나, 자기 생각과 결정이 틀렸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을 좇아 행동해 버린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요나는 니느웨에 대해 하나님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3:10 → 4:1-2).  이처럼 세상이라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성경대로 했다가는 결코 재미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남아있는 한 그는 아직 1장의 요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결코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불신 결혼을 성경이 명백하게 거부하지만 -"너희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후6:14a)- 어디 현실이 그런가.  그러니 "결혼해서 예수 믿게 만들면 되지 뭐!" 그런다.  이것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스로 바꿔버린 현대판 불순종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처녀로 늙어 죽으면 누가, 목사가 책임져 주나?"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분명 아직 1장의 요나일 뿐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자꾸 다시스로 내려가는 유혹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스에는 행복도, 기쁨도, 축복도 없다.  1장 같은 혼돈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뺄셈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못난 불순종의 요나와의 파트너쉽을 포기(파기)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저를 축복하신다.  하지만 요나 스타일의 사람들마저도 착각해서는 곤란한 것은 마치 자신들이 대단해서 하나님의 이런 은총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만약 이렇게 되면 정말 구제 불능이다.  인생이 만나는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나처럼 살아도 그에게 희망의 여백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 때문이지 결코 인간의 선함 때문이 아니다(롬9:14-18).  하나님은 시한폭탄(時限爆彈)처럼 행세하는 요나를 기막힌 방법으로 리모델링(remodeling)하신다.

참으로 기막힌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것이다 : "하나님은 축복하실 때 뺄셈부터 하신다."  요나 역시 그렇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뺄셈하지 않으시고 비록 그가 아직은 깨닫지 있지 못하지만 그의 모든 환경을 철저하게 뺄셈하신다.  요나는 다시스를 덧셈하지만 하나님은 니느웨를 통해 그를 다시 쓰시기 위해 여기에 불필요한 모든 것을 지금 뺄셈하고 계신다.  그는 이 진리를 물고기 뱃속에서 깨닫는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님이 뺄셈을 시작하신 것으로부터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뺄셈에서(창12:1- ),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채색옷을 입고 살던 요셉에게 구덩이에서부터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가족을 구원하기까지의 끝없는 뺄셈에서(창37:1- → 41:37-46 → 46:1-27), 바로의 아들에서 도망자가 되어 광야의 야인이 된 모세에게 불어닥친 광야 40년이라는 뺄셈에서(출2:1- → 3:1- / 행7:20-37, 히11:23-26), 어린 소년 때 사무엘에게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30세에 왕이 되기까지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에 계속되는 뺄셈에서(삼상16:1- → 삼하2:1- ), 그렇게도 잡고 싶었던 고기는 물론 그물과 배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던 베드로의 뺄셈에서(눅5:1-11, 마16:24-25)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    



부스러기 묵상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하나님은 이미(already)지만 요나는 아직(not yet)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의 아직 앞에서도 묵묵히 일하신다.  아직 답지 못해도, 아직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도, 아직 사명과 소명을 따라 준비된 일꾼이 아니어도, 이미의 사랑을 받기에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고 못난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먼저 일하신다.  하나님은 먼저 당신의 것을 주신다.  하나님은 먼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  이것이 바다 물 속에 요나보다 먼저 가셔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바로 이분이 요나와 '요 나!'의 하나님이시다.

요나는 12절처럼 살아도 하나님은 17절로 그를 만나주신다.  그를 17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  하나님은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그곳에서 수풀에 걸린 한 수양을 이미 준비해 놓고서 그를 기다리셨다(창22:13).  하나님은 리브가의 태중에 있는 아우 야곱을 이미 형 에서보다 먼저 사랑하셨다(창25:23).  하나님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고 있는 나아만보다 먼저 그곳에 가셔서 깨끗하게 된 그를 만나기 위해 이미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왕하5:1-14).  

하나님은 요나보다 앞서 이미 물고기를 준비하사 바다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다(17).  참으로 기막힌 섭리요 사랑이시다.  잘 한 것도 없는 요나다.  스스로 죽기를 구하고 바다에 자신을 던져 자살을 시도한 요나다.  타락한 선지자다.  사명을 버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요나다.  그런데 이런 그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물고기 뱃속으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은 이미(already)이시지만 요나는 아직(not yet)임에도 말이다.  요나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을 만한 아무 자격이나 조건이 없음에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요나를 짝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바다 깊은 속까지, 그리고 물고기 뱃속까지 그를 찾아가신다.  이것이 동시에 '요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마침내 요나는 물고기뱃속신앙훈련학교에 입학한다.  삼일삼야(三日三夜)는 과연 요나에게 어떤 의미의 시간이 될 것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길목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등장할 것인가.  이쯤해서 하나님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은 2장의 요나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것이 3일의 비밀이다.  때때로 오고가도 못하는 막다른 지점에 서 있게 하실 때 요나를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침묵의 3일이 시작된다.  이제는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 앞에 서야 할 결단의 순간이 왔다.  나의 삶이 요나처럼 일 때 그것은 하나님이 뭔가를 시작하시는 때이다.  물고기 뱃속에 있어도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  지금 왜 하나님이 나보다 먼저 물고기 뱃속에서 실패한 나를 기다리고 계신가를 생각해야 할 때다.  그 해답은 이미 물고기 뱃속에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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