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나 | Jo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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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0 (19:14) from 112.167.33.19' of 112.167.33.19' Article Number : 11
Delete Modify 김충만 (bibleqter@gmail.com) Access : 596 , Lines : 26
心碑묵상029(1.29)_물기기뱃속신앙훈련학교(욘2.7)
심비묵상(心碑默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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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기뱃속신앙훈련학교(욘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요나 2:7)

하나님(1.1)과 하나님(4.11), 시종(始終) 그 사이에 인간 요나가 서 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 순종한다. 1장에서 바다와 폭풍(4,15), 선장과 무리(14,16), 제비뽑기(7), 그리고 큰 물고기(17)도 그랬다. 이방인은 물론 자연과 생물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요나만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용납하시며 상대해 주신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 없이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하나님과 요나의 숨바꼭질, 이게 ‘요나이야기’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럭비공 같은 요나를 끝까지 품으신다. 오래 참으신다. 이렇듯 요나의 배후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야기는 요나에게서 ‘요 나!’에게까지 전달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데 요나처럼 ‘요 나!’는 어찌 그리 변덕스럽고 좁쌀스러운지 모르겠다.

사실 2장에 등장하는 요나의 기도는 결코 위대하지 않다. 1장을 만났으면서도 2장으로 빨리 항복하기(자원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변함없이 자비(1.17)를 주시자 마지못해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온 요나 아닌가. 그래도 하나님은 요나의 자존심을 살려 주신다. 그가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시사 다시 하나님 앞에 서도록 만드시다니 말이다.

삼일삼야(三日三夜, 1.17)라는 [물고기뱃속신앙훈련학교]에 하나님은 강제로 요나를 집어  넣으신다. 이것마저도 은혜다. 요나가 하는 것이란 하나님을 “피하려고 … 도망하려”(1.3)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막다른 골목 끝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결단과 회개와 기도의 모양새를 갖추어 주시면서까지 요나에게 그러셨듯이 ‘요 나!’를 다시 소명자로 받으신다.

고난의 자리를 기도의 무릎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1장 17절 다음에 곧바로 2장을 읽으니까 쉬운 공식처럼 보이지만 요나에게는 자신의 절망의 끝을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으로 잇는 시작을 위해 3일이 필요했다. 이 복된 일이 기도로부터 꿈틀거리고 있음을 주목한다.

요나는 지금 몸뚱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뱃삯을 지불하고 남은 돈과, 다시스행 배표도, 약간의 필요한 것들이 든 짐 보따리도 다 자기 품을 떠나고 마치 탕자처럼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 앉아있다. 바로 이때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자리이다. 요나는 자기 자신에게 절망한다. 다 잃었고 모두가 다 자신의 품을 떠났다.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품을 떠났듯이 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면목 없는 자신을 만나주신 것이다. 물고기 뱃속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물고기 뱃속까지 추락한다 해도 다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스올의 뱃속 구덩이에까지 몰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찾아오사 만나주시는 사람,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 다시 돌아갈 곳에 있는 사람, 다시 부를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 사람, 그러니까 탕자와 같은 사람은 아직 희망이 있다. 요나의 희망은 그의 끝이 하나님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라는 은혜의 처소였다는데 있다. 그렇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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