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 Ecclesiasters

2001/04/30 (10:55) from 211.175.197.44' of 211.175.197.44' Article Number : 18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4062 , Lines : 85
전9:1-10 |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


  본문 관찰

 생의 공통분모(1-3)
 산 자의 희망(4-6)
 어떻게 살 것인가?(7-10)



산 자의 남은 여백(餘白)

8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 허락 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기쁨(희락)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8:15b)  그래서 솔로몬은 계속해서 생(生)을 즐기라고 권한다 :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8:15a, 2:24-26, 3:12-13,22, 5:18-20, 6:2a)  문제는 이처럼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무한을 다 파악할 수 없다는데 있다(8:16-17).  이게 인생이다.  그리고 이게 전도자의 고민이기도 하다.  결국 전도자는 헛됨에서 헛됨(1:2∼12:8), 그 해 아래서 살아가는 인생에게 아직 남아 있는 삶의 여백을 어떻게 채우며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이끈다.



생의 공통분모(1-3)
산 자의 희망(4-6)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1)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일이 일반이라."(2a)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을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3a)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4a)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5a)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러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무지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일반이다.  이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무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이는 단순히 무신론적 비관주의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모든 사람의 공통분모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惡)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惡)이 가득하여"(3)처럼, 문제는 죄악(罪惡)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生)을 즐기며(8:15a, 2:24-26, 3:12-13,22, 5:18-20, 6:2a)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 불확실한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하나님의 손'에 이 모든 일들이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죄'와 더불어 공존하기 때문에 결국은 생이라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것, 이것이 전도자의 눈에 비춰진 인생의 실존이다.

죽음 앞에 모든 인생은 평등하다.  생(生)과 사(死), 그 사이에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사람들로 살아가지만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 이게 인생이다.  하지만 전도자는 인생을 결코 비관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살아있음을 본다(4-6).  그게 희망이니까.  죽는 것을 미루거나,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러나 살아있음만이 갖는 여백이 아직은 있기 때문이다.  전도자의 탁월한 지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죽은 자의 절망을 말하는 것들을 그대로 뒤집어보면 결국 그것만큼이 산 자의 희망이 된다.  바로 그 희망의 여백을 악(惡)으로 채울 것인가(3), 아니면 '희락'(8:15)으로 채울 것인가, 바로 그것이 아직 남아 있는 살아있음의 여백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 불확실한 '미래'(1) 이지만 말이다.  

쉬운 전도서 읽기를 어려운 묵상으로 끌고가는 것 아닌가 싶지만 이 대목에서 뭔가 조금은 정리가 되는 듯하다.  피할 수 없는 일반인 죽음 앞에 서는 그날까지 아직 남아 있는 생(生)의 수레바퀴를 결국 헛되고 헛된 죄인으로 마감하면서도 끝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면서 그 안에 채워주시는 희락을 누리며 살다가 죽을 줄을 알 것인가, 바로 이 교차로 앞에 서 있는 자가 인생임을 전도자는 통찰한다.  이것이 아직 산 자의 희망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7-10)

   "너는 가서 기쁨으로 … 즐거운 마음으로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라."(7)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9)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10)

산 자의 남은 여백(餘白)을 이처럼 채워가기를 나 역시 소망한다.  비록 여전히 해 아래서 의 세상은 헛된 평생의 모든 날이지만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살아가야 할 사명이 이미 주어져있다.  이것이 8:1절에서 말 한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하나의 열매 아닐까 싶다.  생을 가리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라고 눈물지을 겨를이 없다.  아직 '사람의 본분'으로 채워야 할 남아있는 생(生)의 여백을 '어떻게 살 것인가?'로 채워가기 위해 솔로몬과 더불어 지혜로(智慧路)를 따라 나선다.  



부스러기 묵상

생은 결코 화려하거나 거창스럽지만은 않다.
'가정행복'으로 생의 여백이 가득하기를 소망하는 전도자의 소박한 꿈이 마음으로 느껴진다.  가정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9b)이다.  가정의 행복은 그냥 주어지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가정은 헛되고 헛된 생으로 끝나지 않도록,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생의 현장(field)이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내 '가정행전'이 성취되어져가기를 기대하신다.  

내게 주신 가정(家庭)을 생각해 본다.  사실 지난 25일이 결혼 9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날 내 손가락에 있는 링반지와 동일한 것을 구하기 위해 주변을 맴돌았지만 결국 얻지 못하고, I-Card(인터넷카드)만 보내고, 언제나처럼 편지를 쓰고, 그리고 좋은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기회를 주신 분께 감사!- 조용히, 그러나 감사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처럼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것,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역시 오늘의 묵상을 위해 쓴 편지는 아니지만 나에게 주신 가정의 창을 슬쩍 열어본다.  아내에게 혼날지 모르겠지만.



주의 이름으로 당신을 축복합니다!

 찬미예수

 지난 9년을 하루같이 함께 달려왔습니다.
 지난 99년 12월 6일부터는 예준이와 함께!

 당신은 고마운 사람입니다.
 사랑했음보다 사람받음이 더 많기에 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역전될 것 같지 않은 이 모습이 그래도 아름답도록 당신 곁에 늘 서 있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길고 긴 사랑이야기를 당신과 예준이와 더불어 써감이 복되디 복됩니다.
 축복합니다!

오늘 같은 날만 잘하는 남편이 아니기를 다짐해보지만 부끄러움뿐입니다.
아내로, 엄마로, 학생으로, 그리고 사모로 동분서주하는 당신이 조금은 안쓰럽습니다.
가끔 예준이 옆에 잠들어 있는 당신의 얼굴을 한참씩 바라보는 내 마음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 넘치는 다행스럼이죠.
정말 9년을 하루같이 함께 해 왔어요.
당신에게 미안함만 쌓아가는 못남이 부끄럽지만...
이제는 예준이와 함께 이 복됨을 나눌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크고 크신 섭리를 서로에게서 보고, 찾고, 구하고, 얻고,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당신이 있기에 오늘의 기쁨과 감사가 있고, 또 이게 모여서 더 큰 은총의 열매들을 맺게 되겠지요.  아직 여전히 답지 못한 남편으로 인한 여러 몸부림을 오늘도 미안함으로 말 할 수 밖에 없음을 어찌해야 될지...  그럼에도 당신이 나에게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베드로처럼 고백할 뿐입니다 : "내가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알지요!"

 2001년 4월 25일


  결혼 9주년을 기념하며...
  당신의 사람받는 남편이자, 예준이의 아빠인 김충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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