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 Genesis

2000/11/07 (13:08) from 210.219.129.234' of 210.219.129.234' Article Number : 32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5033 , Lines : 75
창12:10-20 | 아브라함의 이동을 추적한다.



  구조 관찰

 아브라함 / 갈대아 우르(하란) → 가나안 → 애굽 → 가나안
 사라                                           (벧엘)           (벧엘)
 롯



내가 선 땅은 거룩한가?

본문은 장소(지명)의 이동이 주는 교훈이라는 맥락에서도 매시지가 있다.
단순히 '지명'(地名)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내가 서 있는 곳(지명)이 종종 하나의 메시지를 갖는 경우가 많다.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지명 Motif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리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 주신 약속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명령과 약속 밖으로 나갔을 때 만나는 것들 속에서,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주제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먼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재하셨던 '여호와의 성막'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막이 중심이지, 성막이 머물렀던 곳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성막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이 핵심이다.  이것은 법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친히 명하셔서 건축했던 솔로몬의 성전도, 예루살렘 성전도 지금은 현존하지 않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일곱 초대교회 또한 지금은 흔적뿐이다.  현재는 회교도(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회교' 성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지명' 그 자체가 불변하는 어떤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장소의 이동과 관련된 명령과 약속을 통해서 무엇인가 메시지를 주셨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장소 이동에서 분명하게 밝혀지는 진리다.   



아브라함의 이동을 추적한다(창11:31-12:20).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의 조상이 된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그가 장소 이동을 하는 것과 그대로 만난다.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그 안에 중요한 영적 교훈들이 있다.



1. 갈대아 우르(하란, '강 저편', 수24:3, 14-15) → 지시'할' 땅 → 가나안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무엇보다도 창세기 12장 1절이다.  그의 이름이 드디어 성경의 핵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으로 말미암는다.  그는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는 하나님의 명령과 예정된 축복의 말씀을, 마침내 좇아갔다(4).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는 분이 하나님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1), 그리고 그는 이 명령에 순종한다.

그렇다면 우상의 땅, 우상을 만드는 아버지 데라의 품에서 자랐으나 그는 아담 → 셋 → 에노스 → 에녹 → 므두셀라 → 노아 → 셈으로 이어지는 계보(창5:1- 32, 11:10-32) 속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구전(口傳)을 통해서 전해 듣고, 알고, 믿고 있었다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  아브라함은 바로 그 하나님의 뜻(부르심)에 순종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 즉 인도하시려고 했던 곳은 분명히 '가나안'이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한편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7b-8).  문제는, 그런데 그가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9).  이것은 하나의 '화근'이요, 불행을 품게 되는 씨앗이었다(약1:15).  앞에서 살폈듯이 어떤 지리적인 장소에 있고 없고 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이동한 것이 문제의 시발이 된다.



2. 가나안(벧엘) → (점점 남방으로 가다) → 애굽

아브라함의 일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창세기 12장 10절일 것이다.  그는 은총을 입자마자 곧 바로 행복과 불행의 길목을 태연스럽게 넘나드는 모험(?)을 감행하고야 만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는 명령을 좇아갔다.  그 땅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가나안'이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은 가나안이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땅에 발을 내리고 서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문 10절이 갖는 영적인 진리들을 찾아보자.  그 땅, 즉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있다.  그것도 심한 기근이었다.  하나님이 지시'한' 땅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이 땅(세상)이 갖는 두 모습, 즉 가나안의 이중 구조다.  가나안은 그곳이 가나안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유토피아가 아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가 만나는 시험(고전10:13), 탄식(롬7:24) 고백은 중생 이후의 고백이라는, 그러니까 이미 죄의 자리에서 의의 자리로 넘어와 있어도 만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아브라함이 놓친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스스로 십자가 밖으로, 은총 밖으로, 그리스도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 발걸음은 "우거(寓居)하려 하여" 내려간다.  잠시 잠깐이 아니라 정착하려고, 즉 "하나님이 없어도 좋다. 배고픔만 없어다오!"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예전처럼(4) 말씀을 좇아 간 것이 아니다.  말씀의 지도와 인도함을 받지 못할 때의 결과(군상)들을 보라.  하나님이 이미 7절에서 약속한 땅을 버리고 내려간 불순종의 발걸음이다.

애굽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숨결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의 심히 부패한 죄의 찌꺼기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먼저 자신의 죽음을 염려했다(12).  복의 근원(12:1-3)이 될 그가 한갓 자신의 죽음을 염려하며 걱정할 정도로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으로 추락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거짓말을 한다(13).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소위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것들이 애굽이 던져주는 미끼들이다.  사실 이것들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 속에도 들어와 있는가?



3. 애굽 → (남방으로 올라가다) → 벧엘

자가 자신에 대해 '절대절망'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 앞에 결코 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망'의 부스러기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소위 자존심이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원수되는 죄악의 씨앗이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이 때의 인생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며, 믿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애굽 충격을 통해 이 진리를 깨닫는다.  결국 아브라함은 다시 벧엘로 귀환한다.  하나님에 대한 항복이다.  벧엘은 그가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이다(8).  그는 드디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했던 '살아 있는 현장'(field)으로 복귀한다.  소위 '첫사랑'을 회복한 것이다.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은 주님의 책망을 받는다.  초대 일곱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를 보라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벧엘은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은 곳이다(7).  아브라함은 예배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곳이 바로 가나안이다.  그는 벧엘,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었다(8).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처음에 지시'한' 땅에서의 신앙을 그대로 회복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또 하나의 땅

반복되는 아브라함의 실수를 만난다.  창세기의 흐름 속에서 볼 때, 그는 이미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죄악을 반복하는 약한 신앙이었음을 보게 된다.

   A  지시할 땅(12:1) → 가나안(12:7)
      B  가나안(12:7) → 애굽(12:10)
         C  애굽(12:10) → 벧엘(13:1)
      B'  벧엘 → 남방(20:1- )
   A'  지시한 땅 → 벧엘(35:1- )


악인의 집에서의 천년이 주의 전에서 지낸 하루보다 못하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고통 속에서 깨닫게 된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 것이다.  애굽에서의 아우성을 겪는 것만큼 빨리 신앙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브라함처럼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야 할 때다.  애굽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의 땅이 아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벧엘로 이동해야 만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내가 선 땅은 거룩한가를 생각한다.  내 영혼의 땅을 불신앙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내 신앙의 영토를 촘촘하게 챙겨야 할 때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애굽은 종종 세상으로 비유된다.  성경은 애굽=세상=죄악=심판=사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는 동일한 성경이 "애굽으로 내려가라."(마2:13)고 말씀하고 있음에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의 약속을 의지하여 풍요를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자리한다.  지금도 이 진리는 유효하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지만(3:16), 교회와 진리와 성도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며, 섭리하시며,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신다.  그런데 이것들을 뒤로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시류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고통과 시련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내가 선 곳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늘 관심하는 땅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칫 정신 차리지 못하면 애굽에서 파산하여 가나안에는 탕자처럼 귀향할 수 있다.  이것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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