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 Esther

2000/10/19 (11:34) from 210.219.128.190' of 210.219.128.190' Article Number : 11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4891 , Lines : 75
에6:12-7:10 | 심판은 반드시 있다.
2000/07/25



 본문 관찰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족속이면 …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둘째 날 잔치에 …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왕이여 …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뇨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화를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심판과 승리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니라."(잠24:1)

하만은 악인의 비극적인 말로(末路)를 보여준다.
마침내 에스더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심판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만의 몰락은 그 시작을 알리는 전조등과 같다.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는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에스더서는 이러한 심판 모형을 소개해 주면서, 영적 전쟁에 대한 승리의 소망을 바라보게 한다.  에스더나 모르드개나 유다인들에게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어찌 보면 하만 스스로 망아지처럼 날뛰다가 자멸한 셈이다.    



자중지란(自中之亂, 6:12-14)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5:7)

하만의 몰락이 얼마나 신속하고 급작스러운가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작 하만만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만약 그가 이 일을 조금이라도 눈치를 챘다면 그는 6장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유다인 말살정책(3:7-15)을 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7장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다.  이처럼 죄가 죄인 줄 모르고, 마지막 결론이 실패와 죽음과 저주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하만 뿐인가.  그러기 때문에 실패를 위해 은 일만 달란트를 투자할 수 있었고(3:9), 죽음을 위해 25M나 되는 나무를 세울 수 있었고(5:14), 저주를 선고받기 위해 아내와 친구들을 다시 부른다(6:13).  

참으로 "빨리"(6:14b) 진행된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기고만장(氣高萬丈) 해 하던 하만이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그는 외면당한다 :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족속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저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6:13b)  이처럼 악인이 악인의 결말을 안다.  

사실이다.  사탄(마귀, 귀신)은 자기가 패배한 줄 안 것이다.  좀 더 성경 적으로 말하면 사탄은 이미 태초의 에덴에서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선포는 창조 → 타락이면 죽음(심판)이었다(창2:17).  사탄은 이 경고를 현실이 되게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함으로써 시작된 인류를 곧바로 이렇게 끝나버리도록 의도적으로 부추겼다(창3:1- ).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 → 타락 → 구속으로 섭리하셨다(창3:15).  

바로 이러한 의도적인 악한 전략이 하만에게도 발견됨으로써 그가 사탄의 하수인(下手人)임이 명백해졌다.  하만은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3:1,10, 8:3)이다.  아각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이 싸운 적이 있는 아말렉 -사울 당시 아각이 그들의 왕이었다- 족속이다(삼상15:1-3,7-9).  이 아말렉 족속은 출애굽한 거룩한 공동체인 이스라엘(고전10:1-4)을 처음으로 도전한 악한 세력이다(출17:8,13-16).  이들은 반드시 멸해야 할 세력인데(신25:17-19), 오히려 에스더서에 와서 이 구조가 역전되어 있다(3장 묵상 참조).  사탄은 이방 수산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인 안목에서 좀 더 포괄(거시)적으로 볼 때 하만의 몰락은 하나님의 심판, 그러니까 죄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심판의 모형론적 예표(typology)인 셈이다.  죄와 악, 그 원흉인 사탄에게 승리란 결코 있을 수 없다.  하만에게서처럼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결국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1-4, 롬1:17)는 하나님의 약속만이 십자가의 구속과 은총 안에서 유효하다.



인과응보(因果應報, 7:1-10)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7:9b-10)

왕후가 된 에스더(2:1-23) → 하만의 음모(3:1-15) → 금식과 기도(4:1-17) → 첫번째 잔치(5:1-8) → 심판 예고편(5:9-6:14)에 이어서 마침내 두번째 잔치가 시작되었다.  4장은 사방으로부터 포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희망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도 이후의 섭리행전은 흔들림 없이 진행되었다(5:1a- ).  아하수에로와 하만의 화려한 잔치에 비하면 에스더의 잔치는 하나의 초라한 희망사항을 소원하는 것에 불과한 것 같다.  

과연 어떤 잔치가 진짜 승리이며,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그리고 누구로부터 오는 것일까?  온 유다인은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에스더와 온 유다인에게 승리를 허락하셨다.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이며, 일그러진 모든 것을 바른 질서로 되돌리게 하는 힘이다.  에스더는 결코 조그마한 승리(6:10-14)에 취해서 흥분하지 않고 예정대로 잔치를 배설한다(7:1).  또 도도하게 흐르는 섭리를 역행하지 않고, 생명을 건 영적 승부수를 던진다(7:3-6a).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 만든 나무가 아닌가.  그런데 그 나무에 자기 자신이 달려 죽는다.  하만의 서른 잔치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모르드개를 대항하면서 등장하였지만 결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싸움을 시도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이미 실패'한' 싸움을 시도하다가 스스로 자멸한 어리석은 인생의 대명사가 되었을 뿐이다.



부스러기 묵상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

심판 당한 하만을 보면서 즐거워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지만 이 심판을 에스더가 면하게 된 것은 그녀의 의로움이라는, 그러니까 내가 착하고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심판이 면죄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겠다.  이미 기억하듯이 에스더는 그녀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함으로써 율법을 어겼다.  또한 이혼한 남자가 아닌가.  더더욱 결혼 이전에 성관계를 한 간음녀다(2:16-17).  율법을 어긴 것은 이뿐이 아니다.  에스더의 잔치는 -이것은 믿을 만 한 하나의 유추다- 율법이 정한 음식법을 따라 준비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잔칫상에는 부정한 음식들이 준비되었을 것이다.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하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잘 나고, 똑똑하고,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기에 나는 심판을 면하고, 하만과 그 졸개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구원이 나의 행위나 의(義)로 말미암지 않듯이 심판 또한 그렇다.  하만의 심판 받음을 보면서 나도 이처럼 죄악의 편에 서면 하만처럼 취급된다는 경고를 듣고 있는 중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거역하고서도 형통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심판은 반드시 있다.  하만의 침몰을 통쾌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아침이다.  나도 하만처럼 취급되었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곧 죄사함으로, 성령님의 지켜주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라도 살아있는 것 아닌가.  심판을 보며 나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다가, 그 은혜가 너무 위대하기에 조용한 감동과 감격 앞에 하나님을 더 생각하며 하루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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