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 Ezra

2003/11/19 (11:59) from 61.73.241.226' of 61.73.241.226' Article Number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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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18) 스7:1-28 | 에스라(Ezra) 스타트
2003/11/16-18



 본문 관찰

 에스라 이야기(1-10)
   바사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孫)이라
   여호와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아닥사스다 칠년에 이스라엘 …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아닥사스다의 조서(11-26)
 에스라의 찬양(27-28)



제2차 포로귀환

   536  제1차 포로 귀환(1:5-2:67, 고레스 원년)
   516  성전재건(6:13-15, 다리오 6년)
   458  제2차 포로 귀환(8:1-20, 아닥사스다 7년)

마침내 에스라(Ezra)가 에스라서의 무대에 등장한다.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는 56년이라는 세월이 들어있다.  여기에 스룹바벨을 필두로 한 제1차 포로귀환에 따라 성전을 재건한 20년을 더하면 후 그만큼의 시간이 더 흘렸고(1-6장), 이제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제2차 포로귀환과 그 이후를 다루는 내용으로 넘어간다(7-10장).  바로 그 사이에 에스더 이야기가 자리한다.  아닥사스다(Artaxerxes)는 에스더를 왕후로 맞은 아하수에로(Xerxes)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사의 왕이 된 사람이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고소를 받아들여 성벽재건을 중단시키기도 했는데(4:6-23) 아마도 이때가 하만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역시 이 와중에 에스더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역전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이런 기회의 때를 준비하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를 누리도록 하신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역시 한사람 에스라를 주목하셨고, 마침내 그는 에스라서의 무대에 당당하게 입문한다.  그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를 쓰실까?  그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큰일은 무엇일까?



에스라 이야기(1-9)
에스라의 결심(10)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6b)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9b)

에스라는 제사장 가문의 후예다(1-5).  하나님은 보석처럼 빛나는 한사람을 오랫동안 품고 계시다가 이스라엘의 회복이 필요할 때 그를 드러내신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학사, 즉 서기관이다(6).  그는 제2차 포로귀환을 통해 이스라엘을 위한 일을 시작하면서 먼저 스룹바벨을 통한 제1차 포로귀환의 역사와 성전재건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포로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가를 돌아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사로서 구약에 익숙했을 뿐만 아니라 바사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후의 역사에 귀중한 자료들인 바사의 여러 왕들의 조서들을 열람(수집)할 수 있는 위치에, 즉 아닥사스다의 신임과 신뢰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론(모세시대) → 엘르아살(여호수아시대) → 사독(다윗시대)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후예라는 과거만 화려했던 것이 아니라 제2차 포로귀환을 이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쓰임 받을 수 있을 만큼 그의 현재는 복되고 아름다웠음에 틀림없다.

종종 과거가 빛나는 명가(名家)의 후예들일수록 현재가 가난하고 볼품없는 경향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에스라는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드려지기까지 미래로 가는 길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끊임없이 성찰하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아직 귀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당신의 꿈을 이루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고, 또 찾아내신다.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인가가 아닐까.  스룹바벨과 함께 ‘이미’ 고토로 귀환한 자들의 후예들 안에만 하나님의 사람이 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직’ 남아있는 포로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빛낼 사람들은 자라고 있었다(6b,9b).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어느 곳이든, 어떤 위치(자리)에 있든, 무엇을 하든, 당신의 선명한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주목하신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은 4개월이나 걸릴 만큼 머나먼 길이었다(8-9).  그는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사는 사람이었고(6b,9b), 동시에 사람(아닥사스다)에게도 인정을 받을 만큼 탁월한 사람이었다(6b,12-26).  이 둘을 일치시키며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에스라의 일상생활의 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즉 수평과 수직 이 둘이 얼마만큼 균형을 이루었을까를 짐작하는 일은 신바람 나는 일이다.

아마도 그는 왕의 인정을 받으며 편안하게 사는 것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하고 왕에게 이를 구한 것 같다(6b,13).  왜 그랬을까.  그는 제사장의 후예다.  마침내 예루살렘 솔로몬의 성전 터 위에 다시 재건된 스룹바벨의 성전을 바라보았으며,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들려오는 이스라엘의 소식에 늘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그것이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으리라.  

하지만 에스라 후반부(7-10장)가 전해주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그리 만족스러운 신앙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짐이었을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연구하면 할수록, 자신이 율법대로 살아가는 일에 열정을 불태우면 불태울수록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을 향한 불타는 가슴을 억제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10b)도록 이끌었다.

하나님은 선한 손으로 그를 도우셨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받은바 복(福)을 이스라엘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도록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바 은혜와 축복을 자신 안에 담고 있는 것으로 자족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나누는 일에 헌신하고 싶어 했다.  비록 4개월이나 소요되는 머나먼 길이었지만 그것이 그의 결심을 막을 순 없었다.  그는 바벨론에서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영적으로 황무한 땅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오른다.  아, 에스라의 가슴에는 무엇을 들어있었을까.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하루하루 내달렸을까.  



아닥사스다의 조서(11-26)
에스라의 찬양(27-28)

   “이스라엘 … 중에 …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 예물을 가져다가 … 단 위에 드리고
    그 외에도 … 무엇이든지 … 드릴지니라 … 신속히 … 삼가 행하라
    에스라여 너는 …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 가르치라.”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앞서 아닥사스다(Artaxerxes, B.C. 464-24) 때에 사마리아의 방백과 서기관이 여러 ‘대적’들이 예루살렘 백성을 고소하였는데(4:7-10), 당시의 고소장(4:11-16)에 따라 아닥사스다의 조서가 반포되었고(4:17-22), 그 결과 성벽재건은 중단되었다(4:23).  그리고 다시 7장에서 아닥사스다가 바사를 다스릴 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성경은 아닥사스다가 앞서 보여준 반응을 접고 예루살렘을 중건하는 일에 우호적이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쉽게 짐작이 되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6b,9b)라는 평가에 빛나는 에스라가 서 있다는 점이다.  그는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6b)일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은 그 에스라에게 왕까지 붙이셔서 섭리하시기 시작하신다.  이것이 아닥사스다의 두번째 조서를 낳는다(11-12).  왕은 앞서 자신이 한 조서를 역시 자기 손으로 뒤집을 만큼 하나님의 역사는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4:17-22 → 7:11-26).  이것이 에스라가 이방의 땅에서 이방인들에게 보여준 영성이었다.  

아닥사스다의 조서가 놀라운 것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놀라울 정도로 이스라엘(하나님) 중심이라는데 있다.  남북분열왕국 시대에 어느 이스라엘 왕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자면 감사하고 기분 좋은 일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지금 이방(세상)의 왕에게서 들려온 소식을 읽으면서 이스라엘(교회)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우리시대의 그림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세상이 이 정도라면 그리스도인(‘나’)은 어떠해야 할까.  세상보다 못한 나의 모습이 부끄럽고 속상하다.  

한편 이 모든 일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에스라의 높은 신앙과 겸손이 보석처럼 빛난다 :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나의 위에 있으므로 ….”(27-28)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흘러 자신에게 왔고, 그래서 자신은 단지 그 은총의 통로가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일(제2차 포로귀환)을 섬기는 자리에 서 있다는 고백, 그의 진면목을 슬쩍 드려다 보는 대목이다.



부스러기 묵상

성전이 회복되고 반세기가 벌써 지났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에스라를 들어 쓰신다.  이런 흐름에서 그의 주목하는 것은 7장 이후에서 에스라가 하고 있는 일 때문이다.  나라도 회복이 되었고, 성전도 재건이 되었다.  비록 바사의 지배 아래 있지만 종교적인 자유가 있으며,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이제 자리를 잡았다(6:18).  그런데 에스라 후반(7-10장)을 읽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기 이후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영성)은 인간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모습을 아직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 에스라를 통해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영적인 흐름을 차단하고 새로운 부흥을 시작하시면서 저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영광을 이루고 싶으셨다.  이 일에 에스라가 적임자였다.  시대가 아무리 하나님과 세상을 넘나들며 적당하게 처세하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에스라처럼 선명한 기준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그것이 한사람의 신앙에서 만족되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삶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시는 분이시다.

에스라의 결심이 내 가슴에 불이 된다(10).  나는 무엇을 결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요즘 2004년(안식년)을 어떻게 보낼까에 이런저런 생각과 기도가 모아지고 있다.  정말이지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 구하는 것은 다 받는”(6b) 은혜가 내게도 넘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도 사사로운 결심이 아닌 하나님과 교회와 복음을 향한 복된 결심이 아름답게 뿌리내리고 자라 열매 맺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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