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 Ezra

2003/11/05 (12:11) from 211.186.54.9' of 211.186.54.9' Article Number : 3
Delete Modify 김충만 (thesermon@thesermon.org) Access : 1434 , Lines : 71
(11/03-05) 스2:1-70 | 이제는 회복이다!
2003/11/03-05



 본문 관찰

 서 론(1)
 지도자들(2)  
 백성들(3-35)
   지파별 귀환자(3-20)
   가나안 성읍별 귀환자(21-35)
 종교지도자들(36-42)
   제사장들(36-39)
   레위인들(40-42)
 종들(43-58)
   느디님 사람들(43-54)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55-58)
 분류가 불분명한 평민과 제사장들(59-63)
 귀환자 총수(64)
 노비와 짐승들(65-67)
 돌아온 이후에 한 일들(68-70)



고토(故土)로 돌아온 사람들

   “온 회중의 합계가 42,360 명이요.”(64)

제1차로 고국으로 귀환한 자들이 소개되고 있다(느7:5-73 참조).
70년이라는 세월은 생활의 거처를 다시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를 족히 짐작하게 하는 시간이다.  포로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렘29:1-23)는 이를 짐작하게 한다 :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5-7)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삶의 기틀이 깊숙하게 뿌리를 내렸을 것이기에 다시 이 모든 것을 정리하여 고토로 돌아간다는 것은 웬만한 결단이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다.  좀 더 냉정하게 지적한다면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을 택한 셈이다.  이것이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고향으로 가는 머나먼 길을 나선 사람들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는 이유들이다.



제1차 포로 귀환

하나님은 선지자들이 눈물로 외친 회복의 메시지를 마침내 응답하기 시작하신다(사10:20-23, 44:28-45:13, 48:20, 렘25:11-14, 29:10-14, 단6:28, 9:1-11).  타락 → 심판 → 회복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최종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심을 표현하는 또 다른 이름임을 깨닫게 된다(창조 → 타락 → 구원).  이스라엘은 죄로 타락하였고 그래서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저들을 진토에 내버리시지 않으시고 저들을 회복시키신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도자들(족장)의 모범이 인상적이다(68-70) :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즐거이 드리되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68-69a)  어쩌면 이 일은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영향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간다(70).  자원함으로 드린 아름다운 헌신, 그 이후에야 삶의 터전을 잡는 모습,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4만2천3백60명
7천5백3십7명

결단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생각해 보면 바벨론(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고향을 떠난 사람이 5만 명 정도 밖에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70년이 지난 후 불과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고토로 돌아왔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선지자들의 예언과 하나님이 다시 주신 기회였음에도 돌아오지 않을 만큼 뭔가 깊은 어떤 것이 숨어있는 것일까.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고 있는 종들(43-58, 392명)과 분류가 불분명한 평민과 제사장들(59-63, 652명)과 노비들(65, 7,337명)과 장례의 노래꾼들(65, 200명)이 이처럼 많이 出바벨론과 入이스라엘의 길에 합류하고 있는데 정작 레위지파(40-42)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저들은 성전 막일꾼과는 비교되지 않는 성전을 섬기는 역할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고토로 돌아왔다.  더욱 제2차 포로 귀환 때는 “레위 자손이 하나도 없”(8:15b)었다.  소명(사명)과 책임감보다는 현실의 실리를 택한 것이다.  좀 씁쓸하다.     

사실 出애굽 때에도 순수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닌 ‘중다한 잡족’(출12:38)이 거룩한 행렬에 참여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기브온 족속의 후예들인 느디님 사람들(43-54)과 솔로몬의 정복전쟁에 의해 솔로몬의 궁을 위해 일하는 포로들의 후예들인 솔로몬의 심복의 자손(55-58)이, 그리고 노비들과 장례식의 호곡을 담당하는 노래하는 자들(65)이 이처럼 제1차 포로 귀환자의 행로에 동참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돌아오면 성전을 위해 일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레위지파는 이 거룩한 행렬에 참여하지 않고, 와봐야 아무 것도 보장될 것 없고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편을 택한 자들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예나 지금이나 이해타산(利害打算)에는 얄미울 정도로 밝고 이기적이며, 반대로 하나님은 뒷전인 사람들은 어디를 가도 있는가 보다.  하나님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지 ….    



부스러기 묵상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본성에 이른 자
    이에 … 이스라엘 무리도 그 본성들에 거하였느니라.”(1b,70)

교회를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出바벨론을 해서 入이스라엘한다고 해도 노예의 신분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누군들 이미 70여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일구어 놓은 삶의 분깃들이 소중하지 않아서 그것 다 내려놓고 다시 고토로 돌아오는 행렬에 끼어 길을 나선 것 역시 아니다.  하나님이 원래 자신들에게 맡기신 직분과 사명(소명)이 귀한 것으로 알아 그것이 자기 몫의 십자가인줄 알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결단한 사람들, 그들이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의 선택이었다.

타향살이도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다 무너진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고향살이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좋다.  어디서는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던가.  이왕 하는 것이라면 고향에서, 성전을 재건하면서, 이제는 후손들에게 뭔가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토양을 만들어 주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교제가 회복되어 그분의 영광을 위해 다시 ‘제사장 나라’(출19:5-6)로서의 사명에 불을 밝히는 것을 위해 이 한 몸 드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만 한 가치가 있이 않은가.

하지만 이 거룩한 하나님의 명분보다는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다.  다시 70년이 차면 고토로 돌아갈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반복되는 소망의 메시지를 수 없이 들었음에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일을 포기하는 사람들, 그들은 잠시 바벨론에서 평화를 맛보고 좀 그럴 듯 해 보이는 부스러기들을 통해 만족(자족)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미래는 없다.  그들은 하루살이들처럼 내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기에, 오늘 이후에 대한 아무런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고 만다.

나의 결정(선택)이 저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나라를 잃어버렸고, 성전마저 무너진 시대에 도대체 있다면 무엇이 소망일까.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보다는 자신의 육체적 소욕을 따라 살아가려는 자들, 대체 이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이런저런 면에서 볼 때 약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내린 결단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  나 역시 한 번 뿐인 세상 이렇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고 싶다.  구질구질하게, 구차스럽게, 너절하게,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초라하디 초라한 볼품없는 모습은 나도 싫다.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한 행로에 내 발걸음도, 내 발자국도 선명하게 찍혔으면 좋겠다.  천국에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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