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 Ezra

2003/11/23 (22:58) from 61.105.101.177' of 61.105.101.177' Article Number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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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24) 스9:1-15 | 에스라의 영성(靈性)
2003/11/23-24



 본문 관찰

 문제_이방인과의 통혼(1-4)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
   가나안 …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족속과 사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해법_에스라의 기도(5-15)
   나의 하나님이여 …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우리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제1차 귀환자 vs. 에스라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7:9)    
   “모든 사람이 3일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9월 20일이라.”(10:9a)

성전재건(6장)과 에스라의 활동(7장) 사이에 58년의 시간이 흘렸다.
그리고 제2차 포로귀환의 이야기를 다룬 8장은 4개월이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포로기 이전 세대가 제1차 포로귀환에 일부 합류했었는데(3:12) 아마 그들은 모두 유명을 달리하고 포로 1세대와 귀환자 세대가 주류를 이루며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8장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고토로 귀환해 오던 바로 그때에 이미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이 재건된 스룹바벨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것이 9장으로 넘어가는 이야기의 중요한 관찰이다.

귀환 후 다시 4개월 달포가 지났다(10:9a).  그 사이에 퇴락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재건하는 일이 있었고(8:36), “이 일 후에”(1a), 그러니까 얼추 외적인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에스라와 제2차 귀환자들 역시 새로운 환경에 얼마간 적응을 하며 지내고 있을 때에 백성의 지도자들이 에스라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토로한다(1).  이것이 에스라의 개혁이 시작되는 하나의 단초가 된 셈이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다.  이처럼(9-10장) 사는 것으로 포로 이후의 역사(1-8장)를 이어왔다는 것 말이다.  어찌할까.



문제_이방인과의 통혼(1-4)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4:3a)

돌이켜 보면 58년 전 고레스의 칙령을 따라 잃어버린 고토로 돌아온 이후 20여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성전재건에 힘을 썼었다(1:1, 6:15).  그로부터 세월은 흘러 언젠가부터 이스라엘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방백들의 보고(1-3)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넘지 않아야 할 선(線)을 이미 넘어버린 것이다 :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2)  이것은 “가나안 …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1)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하는 범죄였다.

놀라운 것은 에스라 이전에 그 누구도 이 죄악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58년 동안 스룹바벨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종교생활을 계속해 왔다.  첫사랑을 버린 것 아닌가.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말이다 :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3b)  이런 이중성,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살아온 이스라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처럼 무너져가는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후를 보시면서도 다시금 오래 참으셨다.  정말 여러 가지로 놀라는 대목이다.  

‘강 서편’(4:11, 5:3,6, 6:13, 8:36) 사마리아 사람들, 그러니까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3:2b) 하여 이주해 왔던 무리들인 ‘이 땅 백성’(1a)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2a)음으로써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인들과의 결혼이라는 명백한 죄를 지어오고 있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명백한 거역이다(신7:1-4)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하지만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성전과 제사를 드리는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하나님과 법적으로만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미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1b) 그릇 가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말이다.  정말 겉 다르고 속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모습, 이게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다.  또 다시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은혜를 버리고 옛사람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무대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참으로 무던하신 분이시다.  속은 다 타버리셨을 텐데 오래 참으사 다시 에스라로 승부하기 시작하시는 하나님, 바다보다 더 깊고 하늘보다 더 넓은 그분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언제나 이스라엘(‘나’)은 속이 들까.   



해법_에스라의 기도(5-15)

에스라의 기도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30회 이상이나 나온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불과 4개월 달포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7:9, 10:9) 이 짧은 시간에 여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통혼을 했을 리 만무하다.  그만큼 이 표현은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에” 정통한 학사다(7:10).  신분은 제사장이면서 수준은 이방인이었던 제사장들과는 다르게 살았다(1).  그렇다면 왜 이처럼 하나님께 고백할까.  

그는 진정한 제사장이다(7:1-5,11a).  그는 백성들의 죄를 자기의 죄로 볼 줄 아는 제사장으로 살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면서 이방인 같은 제사장으로 살았던 통혼자들과는 다르게,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바르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쳤던 에스라의 영성이다.  때문에 무엇보다 그는 죄(罪)에 대해 민감했다.  율법에 비추어 죄가 무엇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죄에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에스라의 기도에는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7a) 계속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이스라엘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그려진 쌍곡선으로 묘사되어 있다(7-9).  물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고 그럴 때에만이 이스라엘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10)

율법은 땅에 떨어지고(신7:1-4 → 스9:11-13) 그 결과 “이 모든 일을 당하였”(13a)다고 이해한 에스라의 시각은 맞다.  죄 때문에 포로가 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쓰라린 경험이 시퍼렇게 살아있음에도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죄를 물마시듯 들이키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바라본 에스라의 절망에 찬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죄의 보응을 완전하게 끝맺지 않으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주셨”(13b)다.  하지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과 연혼(連婚)하”(14a)고 말았으니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8a) 우리마저 “남아 피할 자 없도록”(14b) 하신다고 해도 드릴 말씀이 없다며 에스라는 통곡한다.  그는 놀라우리만큼 다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한다.  어떻게 기도를 마무리할까 궁금했는데 ….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들고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린다(15) :

   “그렇지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임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표준새번역)  

감동 그 자체다.  참으로 빛나는 멋진 기도다.  인간이 비빌 언덕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는 고백을 나 또한 동의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뻔뻔스럽기까지 한 기도 같지만 우리 하나님은 충분히 이처럼 나아가도 되는 분이시다.  당신만이 희망임을 믿고 구하는 자를 멸시치 않으시리라는 신뢰만 분명하다면 말이다.  지금껏 에스라의 기도가 나의 실전에서도 반복되는 멜로디로 하나님께 드려졌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안심이다.



부스러기 묵상

시각의 차이는 삶의 차이를 가져온다.
에스라가 제2차 포로 귀환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이전까지, 아니 돌아온 바로 그날까지 무려 58년이라는 세월(1-8장) 동안을 이스라엘은 묘한 이중성을 그대로 품은 채 살아왔다.  그런 모습 그대로, 즉 이방인들과 통혼(通婚)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스룹바벨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해 왔다.  

하지만 이것이 에스라의 앵글에는 전혀 이질적으로 보였다.  모두에게 자연스러웠던 일이 유독 지도자를 몇 명과 에스라에게만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영적 지도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정말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에스라처럼 다르게 보는 것, 다르게 보이는 것, 다르게 볼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의 영성(靈性)이 한 공동체를 새롭게 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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